2003년 겨울,
노동단련대의 모습
- 18살 탈북 소년의 체포, 송환 그리고 탈출 -
편집자가 독자에게 지난 2월 15일. 서울 모 교회 전도사 한 분이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의 부탁이라며 저희에게 노트 한 권을 건네주셨습니다. 그
노트에는 깨알 같은 크기로 일기 형태의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18세 탈북 소년이 중국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되고, 다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보호를 받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선교사에게 이야기했는데, 선교사가 소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쓴 것이라 합니다.
이 글은 날짜 별로 잘 정리되어 있어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체포되었을 시 어떠한 경로를 거쳐 송환되고 조사를 받으며,
어떠한 처벌을 받는지 순차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소중한 기록을 우리에게 전해준 탈북 소년과 선교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일부 날짜를 변경하였으며 필자의 신상을 알 수 있을 만한 지명이나 인명은 변경하거나 기호로 대체하였고,
독자들의 가독성(可讀性)을 높이기 위해 문장을 일부 변경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지명을 변경하다 보니 실제 그곳의 상황,
북한의 교통 체계 등과 약간 다를 수도 있음을 양지바랍니다.
2003년 10월 19일 일요일 | 체포, ○○○간수소
오늘은 예배를 드리는 날이라 교회로 갔다. 예배가 시작되고 나서 조금 후, 낯선 남자 세 명이 들어와서 전도사님과
몇 마디 나누고는 나를 나오라 하였다. 무엇을 물어보겠단다.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가자 한족(漢族 ; 중국의 다수민족.
탈북자들은 조선족 이외의 중국인들을 대개 한족이라고 부른다. -편집자 註) 사람이 나를 꽉 잡았다.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이젠 끝장이로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공안국(公安局) 차에 올라타니 조선족(朝鮮族) 남자가 “영호는 왜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이 겁을 주며 왜 모르냐고 윽박질렀다. 영호 형과 내가 많이 아는 사이로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거짓말을 해도
경찰들이 믿을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달려서 내리니 ×××파출소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 세 명의 경찰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한족이고,
한 사람은 조금 무서운 표정을 한 조선족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주 순하게 생긴 조선족이었다. 순하게 생긴 사람이
나를 취급했는데 몸에 있는 것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나에게 있는 것이라곤 허리띠와 집 열쇠, 돈 30원뿐이었다.
이것을 모두 내 놓았다. 또 묻기 시작했다. “영호는 어디 있는가” 하고.
나는 “한 달 전부터 출근한다며 나갔는데 그 후로는 만나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북조선 사람이 사는 집을 네
집만 불면 나를 놔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짜 네 집만
대주면 나를 놔줄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꽉 찼다. 하지만 내가 아는 조선사람들의 집을 대준다면 그 사람들이 곧
잡혀가서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그 사람들이 모두 은인들인데 양심상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은 “할 수 없지, 조선에 혼자 가서 실컷 고생해 봐라” 고 말했다.
그 후 나는 문건을 쓰기 시작했다. 이름, 언제 중국에 와서 무슨 일을 했으며, 어디서 살았으며, 집주소와 가족관계
등 여러 가지를 물었다. 다른 것은 솔직하게 말했지만 중국 어디서 살았는가 하는 물음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배 드리는 장소에서 체포되어 할 수 없이 그 집에서 3월 25일부터 10월 19일까지 살았으며 그저
그 집 아주머니의 심부름이나 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했다. 생각 밖으로 모든 일이 아주 간단하게
빠른 시간 내에 끝났다. 경찰들은 내 물건 가운데 허리띠를 돌려주었지만 열쇠는 자기들이 보관하고, 돈 30원은 쓸
일이 있다며 가져 갔다. 다시 차를 타고 ○○○간수소로 이동했다.
○○○으로 가는 도로 우측 오르막 길로 조금 올라가니 철대문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우측인지 좌측인지에 또 철대문이 있었다. 사면은 모두 담벽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니 경찰 한 명이 복도에서 나왔다.
다른 경찰들은 돌아가고 복도에 나온 경찰이 나의 체포 날짜와 어디 사람인가를 적은 다음 감방에 들여보냈다.
복도 좌측에 있는 철창문을 열고 20걸음 정도 걸어서 감방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에는 한창 점심식사 중이었다.
한족과 조선족이 함께 있었는데 조선족 가운데 9명은 머리카락을 다 밀어 낸 사람들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옥수수빵 한
개를 줬다. 나는 속이 답답한 김에 마늘 두 쪽을 막 씹어 먹었다. 그러고 나니 위가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옥수수빵을
먹어보니 목이 막히고 모래도 조금 씹혔다.
‘이제 조선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에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옆에서 하는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북조선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9명이고 중국 조선족이 6명, 한족이 5명 있었다. 감방 안에서는 우리 조선 사람들이
제일 앞에 있고, 그 다음이 조선족, 한족들은 한쪽 구석에 앉아있었다. 감방 안에는 화장실도 있고 아주 깨끗한 환경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고향 무산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옆 감방에 무산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위안이 됐다. 식사 후 2시까지 오침(午寢)이었고, 2-4줄로 맞추어 앉아있다가 그 후로는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나
하다가 조금 후 저녁 식사가 들어왔다. 저녁에도 역시 옥수수빵과 미역국이었다. 내 손만한 것 하나를 미역국과 함께
먹고 나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한족들이 장판을 닦고 있는데 소장(所長)과 경찰 한 명이 들어와서 우리를 둘러보았다. 나보고 언제 들어왔으며 어디에
사는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내 소개를 했다. 그 다음으로 북한 사람 6명에게 보기만 해도 끔찍한 족쇄를 채웠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검사하고 나서 머리 깎지 않은 사람은 머리를 깎으라고 했다. 중(스님)머리로 북한 사람만 박박 깎았는데
깎지 않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 이었다.
머리를 깎고 나서 바로 잠자리를 폈다. 같은 감방에 있는 조선 형이 나를 자기 옆에 눕혔다. 잠자리에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나보고 노래를 한 곡 부르라고 했는데 끝내 부르지 못하고 대신 팔굽혀펴기를 보여줬다.
나는 평소에 최고로 40개를 해보지 못했는데 47개를 했다. 감방 안의 형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2003년 10월 20일 | 중국 도문 변방감옥
아침 식사는 역시 옥수수빵과 미역국이다. 나는 여전히 하나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할 고생을 생각해서 많이
먹고 싶지만 더 먹고 싶지 않았다.
식사 후 경찰이 들어와서 이름을 몇 명 불렀다. 남자 5명, 여자 3명이었다. 남자는 두 명이 무산이고, 두 명은
회령, 한 명은 리원 사람이었다. 차를 타고 다시 도문(圖們) 변방감옥으로 달렸다. 달리는 차창을 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두 명을 한 수갑에 채워놓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한참 후에 도문 변방대에 도착했다. 건물 밑바닥은 대리석이었다. 2층 건물인데 1층은 변방대원들의 침실이고 2층은
우리 조선사람들의 방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어느 호텔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한 명씩 신검(身檢)이 시작됐다.
겉옷은 벗어서 자루에 넣고 자루 안에 있던 죄인 조끼를 입었다. 신검이 끝나고 다시 파출소에서 썼던 그런 문건을 쓰고
나서 2층 7호 방으로 들어갔다.
감방 안의 공기는 좋지 않았다. 화장실이 감방 안에 있었는데 화장실에는 문이 없어서 그 안의 냄새가 그대로 풍겨 나왔다.
감방 안에는 할아버지들도 있고 삼촌들과 형들이 있었다. 거기서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다. 들어가서 조금 후에 점심식사가
들어왔는데 밥 반 그릇에, 김치인지 죽인지 모를 배추에 물을 섞어 바가지 절반 정도였다. 빈 그릇을 들고 가서 밥을
타고 그 위에 반찬을 타서 숟가락도 없이 개처럼 입으로 먹어야 했다. 혀 바닥으로 한번 채소와 밥을 먹어보았는데 속에서
받지 않았다. 쌀은 그냥 뜨거운 물에 담근 것처럼 딱딱했고 냄새 또한 아주 역했다. 채소는 너무 짜고 모래도 조금
있었다.
식사 후 어른들은 어디서 났는지 한쪽 구석에서 몇 명씩 모여 담배를 피우고 할아버지들은 바닥에 줄을 긋고 종이에 글을
써서 장기(將棋)를 하며 놀았다. 감방 안은 하루 종일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그 중 나이가 비슷한 다섯 명의 형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무슨 일을 해도 함께 하고, 함께 먹고, 함께 놀고, 함께 자고, 함께 앉아있었다. 이 다섯 명은
감방 안에 있는지 몇 달이 된다고 했다. 오후 내내 앉아서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한쪽으로 모여 들었다.
가서 보니 그 다섯 명의 형들이 오락을 놀기 시작했는데 신나기도 하고 아주 재미있었다. 밖에서 왔다 갔다 하던 변방대원들도
서서 구경했다. 형들은 저녁식사 후에도 말타기 등 여러 가지 오락을 놀며 감방 안에 웃음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잘 때는 무산 형들이 나를 자기네 옆에 눕혔다. 그래도 같은 무산 사람이라고 항상 나를 부르곤 했다. 그때마다 큰
위안을 받았다.
2003년 10월 21일 | 온성 보위부
취조는 어제 저녁부터 시작되어 오늘 오전에 끝이 나고, 마침내 조선 온성으로 이송됐다. 그렇게 좋던 날씨도 조선에
도착하니 춥고 오싹한 아주 차가운 날씨로 변한 것 같았다. 중국에서 옷을 얇게 입은 터라 더 그랬다. 화물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니 온성 보위부에 도착했다. 예전에 몇 번 들었던 그 곳에 내가 오게 되다니 조금 웃기는 기분이었다.
보위부 안 뜰에 도착하니 보위부에서 다른 곳으로 이감되어가는 사람들이 줄 맞추어 앉아 있었다.
보위부 선생들이 우리 보고 큰 소리로 욕하며 앉게 했다. 쪼그리고 한참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너무 저려서 내 다리 같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야 우리를 복도에 세워두었다. 복도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먹을 것을 가방에서 꺼내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이 마지막 중국 음식이었다. 오후 3-4시쯤 되어 우리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신검을 했다. 내 몸에
있는 것은 허리띠뿐이었다. 그것을 내 놓으니 물건에 번호 28번을 달아놓고 나의 이름 대신 ‘28번’을 기억하라고
했다. ‘이제부터는 완전한 죄인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취조를 받은 후에 감방 안에 들어가는데 감방 문이 어찌나 낮고 작은지 몸을 바닥에 눕히고 짐승처럼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자마자 호실 반장이 새로 온 우리에게 교정(敎正)을 주었다. 교정은 다름이 아니라 그 안의 규칙 같은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오른손을 들고 “선생님, 2호 28번 한가지 제기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은 다음 선생님이
응답을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야 했다. 대 소변을 볼 때도 오른손을 들고 “선생님 2호 28번 소변 볼
수 있습니까?” 한 다음 선생이 보라고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소변을 보아야 한다. 소변을 보고 “선생님 2호 28번
소변을 다 보았습니다” 라고 한 다음 선생의 응답에 따라 “알았습니다” 하고 앉으면 된다.
그 다음은 선생이 뒤 철창에 와서 새로 온 사람들을 찾는 경우다. “오늘 들어온 것은 누구냐?” 하면 새로 온 사람은
벌떡 일어서는 동시에 오른손을 들고 “예, 2호 28번!” 하고 대답한다. 그 다음 돌아서라고 하면 역시 “알았습니다”
하고 뒤로 돌아서되 머리는 들 수 없다. 선생이 머리를 들라고 하면 머리를 들되 눈은 선생의 눈과 마주치면 안 된다.
선생이 집 주소를 물으면 “함경북도 무산군 △△△리 8반 홍○○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취조하려고 부를 때 가장 긴장해야 하며 이때 잘못하면 ‘갈비뼈의 순서가 바뀌도록’ 맞는다고 반장이 말했다.
취조할 때 선생이 나의 번호 28번을 부르면 “옛, 2호에 있습니다” 하고 아주 빨리 문을 열고 뛰어 나가서 복도
벽에 머리를 대고, 손은 목 뒤에 올리고, 무릎을 꿇고, 엉덩이는 들고, “선생님, 2호 28번 취조 받으러 나왔습니다”
하고 보고해야 한다. 취조가 끝나면 “선생님, 2호 28번 취조 받고 돌아왔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같은 행동을 취한
뒤, 선생이 들어가라 하면 항상 “알았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들어가야지 만일 대답이 없다면 큰 벼락이 떨어진다.
반장이 우리에게 이렇게 규칙을 설명해준 다음 혹시 실수가 있을까봐 우리보고 금방 배운 것을 한 번씩 해보도록 한다.
방금 배운 것이지만 모두 긴장해서 하다가도 틀릴 때가 많다. 나와 같이 들어간 형은 하다가 틀려서 반장에게 사정없이
피가 터지도록 맞았다. 그것을 보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나의 차례다. 조심조심 배운 것들을 해나갔다.
나는 한 대도 맞지 않고 끝났다. 알고 보니 반장은 마음이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들어온 우리에게 “저녁 한끼는 굶으면 안 되는가” 하고 반장을 위해 밥 한끼를 굶으라고 했다. 우리는
“예” 하고 대답했다. 이렇게 하고 나니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저녁 식사는 국수죽이고, 양(量)은 손잡이
없는 숟가락으로 다섯 숟가락이었다. 그것을 반장에게 양보해야 했다. 반장과 김철준이라는 아저씨는 감방 안에서 3-4달을
생활했다. 이 두 사람의 식사는 우리보다 양이 많았다.
점심도 못 먹은 데다가 저녁까지 양보하고 나니 배가 몹시 고팠다. 저녁 취침시간은 10시, 기상은 6시이다. 취침은
선생이 와서 잠 잘 준비하면 아주 빠른 동작으로 누워야 하는데 몸을 다 눕히지 말고 머리는 들고 있어야 한다. 이
동작을 하는 시간은 불과 5초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행동이 느리면 선생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반복 동작
등 여러 가지 교정을 받아야 한다. 눕는 것도 편안히 누울 수 없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워야 한다.
2003년 10월 22일 ~ 11월 1일 | 온성 보위부 감옥
이 안에는 햇빛도 볼 수 없다. 24시간 전등을 켜야 한다. 감방 안은 불과 10평방미터가 되나마나 한 아주 작은
방이다. 거기에 1평방미터 정도는 세면장 및 화장실이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세면 순서를 기다려
세면하고 정해진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일이다. 말도 못한다. 하루에 1-2번 정도 일어서서 앞 뒤 사람의 등
두드려 주기와 무릎운동을 몇 분 정도 할 수 있다. 그 운동을 하는 것도 모든 사람들은 힘들어 한다. 엉덩이에 살이
없으니 앉아있는 동안 힘들고 무릎이 아파서 못 견딘다. 그 작은 방안에 제일 사람이 많을 때는 29명까지 있었고 제일
적을 때가 18명이었다. 앉아서도 다리 펼만한 자리가 없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하루에도 몇 명씩 취조를 받는데 취조 받고 들어온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가지각색이었다. 손도장을 찍은 사람들은 더
이상 취급이 없으니 얼굴이 환하고, 손도장을 못 찍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나가서 욕 먹고 매 맞고 끔찍한
심문을 받아야 하니까 얼굴에 그늘이 져서 들어온다. 같이 온 형들은 손도장은 못 찍었지만 취조는 이미 받았다. 드디어
‘28번’을 찾는 선생의 무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떨리고 두렵고 긴장한 마음으로 “옛, 2호에 있습니다” 하고 재빨리 뛰어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를 잘 못해서
맞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침착하게 달려나가서 무릎 꿇고 엉덩이는 들고 머리는 벽에 대고 두
손은 목 위에 올리고 “선생님, 2호 28번 취조 받으러 나왔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선생이 신을 신으라고 하자 재빨리
아무 신발이나 신고 복도로 나갔다. 담당 선생이 나를 데리고 사무실로 갔다. 이름과 나이를 묻더니 종이 두 장을 주며
언제 중국에 갔으며, 누구하고 어디로 두만강을 건넜으며, 어떻게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살았으며, 언제 어떻게 체포됐는가를
쓰라고 했다. 말하자면 자백서(自白書)였다. 나는 솔직하게 다 쓸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거짓 자백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하던 끝에 세상에 없는 아빠를 팔기로 했다.
거짓말도 그 선생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되기 때문에 조심조심 한 구절 한 구절 심사숙고 해서 썼다. 중국으로 간
날짜, 시간, 건너간 곳, 어떻게 갔으며 이런 것들은 솔직하게 쓰고, 아빠하고 같이 동행한 것으로 썼다. 나의 나이는
15살로 하고, 아빠는 나를 데리고 ×××까지 와서 □□□□에서 생활했으며 친척들의 눈치를 보며 자유 없이 힘들게
생활했다고 썼다. 또 아빠가 일을 나간 후 경찰이 와서 나를 체포해 여기까지 왔다고 거짓말 절반 사실 절반으로 썼다.
다 쓰고 나니 한 장 반이나 되었다. 선생이 보더니 많이 썼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묻는 말에 대답할 준비가 됐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은 뭐든지 다 말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선생은 내가 쓴 것은 별로 보지 않고 새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이름, 나이부터 하나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앞서 썼던 것처럼 묻는 말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아마도
다른 시나 노래 가사를 암송해도 그렇게 빨리 암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한번 밖에 쓰지 않은 것을 어느새 다
암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긴장하니까 그런 것 같다. 거기다가 거짓말을 좀 더 보태어 말했다. 그 선생은 그대로
받아 쓰며 내가 쓴 것과 맞추어보았다. 생각 밖으로 매를 한 대도 안 맞고 손도장 찍고 짧은 시간 내에 심문이 끝났다.
순간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기도를 간절히 했던가. 지금은 그때처럼 간절히 기도가 되지 않는다. 심문이 끝나고 들어갈
때, 나올 때처럼 똑 같은 동작을 하니 선생이 들어가라고 했다.
“알았습니다” 하고 2호 감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서로 “손도장을 찍었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신이 나서 “찍었다”고
대답하자 “어떻게 나가자마자 손도장을 찍었느냐”고 수군수군 댔다. 다른 사람들은 몇 번씩 불려 나가야 겨우 손도장을
찍는데 나는 단 한 번 만에 손도장을 찍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이곳에서 건장한 몸으로 나갈 수 있기를, 앞으로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기대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 피 눈물을 삼키며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러다가 옆 사람이 너무 힘들어 하면 위로의
말을 한마디 해주었다. 이 세상에 부모 형제도 없고 아무 재간, 능력도 없는 어린 나도 이렇게 웃으며 사는데 당신이
나보다는 낫지 않으냐고 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나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힘을 얻곤 했다. 며칠 후 온성군에 사는 사람들만 나가게 됐다. (보위부
조사가 끝나면 자기 출신지 보안서에서 인계해 데려가는데, 이곳이 온성 보위부이다 보니 온성 출신자들은 타 도시 출신자보다
먼저 출감하게 된다. 편집자 註) 그 동안 감방 안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으니 서로 인사하며 하는 말이 “이
안에서 죽지 말고 살아서 꼭 이야기해라”, 이 말이었다.
감방 안에서 친구 둘을 사귀었다. 한 명은 병렬이라고 하는 친구인데, 생김새도 잘 생겼고 목소리도 얼마나 좋은 지….
그리고 운동도 잘 했다. 마음도 좋았다. 병렬이와 첫날부터 함께 앉게 되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위로의 말 한마디씩
건네던 그때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온성 사람들이 나갈 때 병렬이는 나갔다. 병렬이와는 약속한 것이 있었다. 매달
5일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역 앞에서 서로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이날 헤어지며 서로 손을 꼭 쥐고,
반드시 살아서 만나자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병렬이와는 헤어졌지만 또 하나의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이름은 리영복, 나이는 18살. 생김새는 여자처럼 얌전한데
어른들과도 딱딱 맞서서 싸웠다. 나는 그 안에서 누구는 싫고 누구는 좋고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냈다.
사람들은 나보고 너무 마음이 곱다고 하며 이 세상에서는 마음이 그렇게 고우면 못산다고 말해주었다. 병렬이와 헤어지고
마음이 쓸쓸했는데 리영복이를 만났다. 영복이도 부모를 일찍 잃고 형과 함께 지내다가 중국으로 몇 번 건너갔는데 그때마다
붙잡혀 들어왔다. 내가 보기엔 다른 애들보다 영복이는 아주 똑똑한 애였다. 둘이서 서로 이때까지 살아온 얘기를 나누며
친하게 지냈다.
2003년 11월 2일 ~ 11월 14일 | 온성 노동단련대
영복이와는 나중에 둘이서 같이 중국에 가 살기로 약속했다. 그러다가 11월 2일, 나는 먼저 온성 단련대로 갔다.
이렇게 영복이와 헤어지고 85명이 단련대 뜰에 들어섰다. 옷은 내가 제일 헐고 얇게 입고 있었다. 그런 차림으로 추운
날씨에 오전부터 저녁 6시까지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거기서 무산에 사는 누나를 만났는데 마음이 좋은 누나였다. 나에게
손목시계와 양말, 바지, 내복을 하나씩 주었다. 그러면서 항상 자기 옆에 붙어 있으라고 했다. 장갑까지 주며 “형들이
알면 빼앗길 수 있으니 잘 보관하라”고 말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은 좋게 해줄 수 있지만 이 누나처럼 옷이며
자기 시계까지 주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단련대에서도 몇 가지 적는(조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한 사람씩 적으니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단련대 침실에 들어갔다.
단련대 침실에 들어서니 우측에는 2층으로 된 나무침대가 있었고 좌측 벽에는 배식문(配食 門)이 하나 있었다. 방안은
아주 넓었는데 여자 남자가 모두 한 방에 들어가 앉으니 침대 위까지 사람이 꽉 찼다. 그 덕분에 추위는 조금 면할
수 있었다. 나는 무산 형들과 함께 줄 맞추어 앉았다.
저녁 밥은 옥수수밥 100g정도에 소금국물을 주었다. 보위부에서 다섯 숟가락의 국수죽을 먹다가 100g정도의 옥수수밥을
먹으니 배부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는 당직관이 있고 반장이 있었다. 당직관은 마흔 살이 넘은 남자로 마음이
아주 순했다. 반장은 무서운 표정을 하고 목소리도 거세고 체격도 아주 좋아보였다. 성격이 좀 거칠어서 무섭긴 하지만
마음은 좋은 사람이었다. 인정이 많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단련대 안에서 웃는 일은 반장 때문에 일어나곤 했다.
여자들은 낮에만 함께 있고 저녁 취침 시간에는 식당칸에서 잤다. 온성 단련대가 좋은 점은 타 시, 군 사람들은 일을
안 한다는 것이다. 단련대안의 규칙이라면, 남녀가 한 곳에서 대소변을 보고 담배와 술이 금지다. 그것을 제외하면 보위부에
비해 모든 것이 자유다.
11월 3일 오전에, 전날 나에게 옷이랑 주었던 누나가 사탕과 월병(月餠) 두 개를 주었다. 그것으로 나를 포함해서
4명이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그 누나가 준 시계가 없어졌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 누나는
우리보다 먼저 온성 단련대를 떠났지만 함께 있는 동안 많은 신세를 졌다. 음식을 몇 번이나 사주었고, 가면서 돈도
1500원이나 주었다. 나는 갖고 있던 허리띠 등을 다 팔아 2000원을 받았다. 그러나 한끼도 배부르지 않았다.
음식이 너무 값이 비싸서, 그것으로 형들과 4명이 함께 먹었으니 내게 돌아오는 몫이 적었다. 내 물건을 팔아 음식을
샀어도 내 것이 제일 적었다. 마음속으로 형들에게 괘씸한 생각이 들었으나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안에서 배고프니 양말도
바꾸어 신고 옷도 바꾸어 입고 하면서 음식을 받아먹었다. 거기서 주는 밥만으로는 배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형들은 먹을 것이 생기면 자기들끼리만 먹고 나에게 무엇이 생기면 함께 먹으려 했다. 몸은 편안하지만 굶주림과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고 성격이 거친 어른들의 눈치도 쉴새 없이 봐야 했다. 잘못하다간 욕먹거나 맞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11월 15일 오후에 보위부에서 사람들이 이감되어 왔는데 그 속에 리영복이도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도 모르게 “영복아” 하고 소리쳤다. 반장에게 몇 마디 욕을 먹고 나서야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병렬이도
만났다. 병렬이는 단련대에 있다가 도주했는데 몸이 너무 허약해서 길에서 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병렬이는 두 번째로
단련대에 들어와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말 한마디 못했지만 손가락으로 ‘매달 5일 오전 11시부터
12시 사이에 ×××역 앞에서의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2003년 11월 15일 | 청진 도집결소로 이동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타 시, 군 사람들을 모두 온성역으로 이동했다. 이제 도(道)집결소로 가는 것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105명이나 되는 대열이 역전으로 향했다. 나의 친구 영복이도 함께 했다. 역전에 도착하니 대합실은 전등도
없고 아주 추웠다. 그 속에 모두 줄 맞추어 쪼그리고 앉았다. 사면에 보안원들의 전지불빛이 왔다 갔다 하더니 촛불을
양쪽으로 켰다. 우리가 도주 할까 봐 불을 켰던 것이다.
조금 후 보안원들은 교대로 식사를 조직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서로 음식을 사먹었다. 또 마음 좋은 사람을 만났다.
내 뒤에 앉은 할머니가 내가 추워한다고 자신의 수건을 주고 과자도 몇 개 주었다. 나는 과자를 영복이에게 제일 많이
주고 그 외에도 세 사람과 나누어 먹었다. 사람들은 나보고 “얻어 먹는 신세에 남을 주느냐”고 했다. 하긴 손가락
두 개만한 과자 4개를 가지고 나까지 5명이 먹었으니 입 어느 구석에 붙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아주 작은
것이어도 나 혼자 먹을 수가 없었다.
밤 10시쯤 되어 영복이가 밥을 주먹만한 것 하나 사고 월병도 10개나 사왔다. 영복이는 나에게 월병 반개를 주었다.
받으며 잘 먹겠다고 인사는 했지만 그 많은 개수 중 나에게 이것만 주니 영복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2003년 11월 17일 ~ 12월 8일 | 청진 도집결소
아침에, 어제 나에게 수건을 주었던 할머니가 밥 하나와 과자 세 개를 주었다. 그것도 영복이와 나누어 먹고 과자는
세 명과 나누어 먹었다. 아주 작은 음식이었지만 나누어 먹으면서 먹지 못한 사람들을 달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는
제일 연약하고 부족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내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크게 감사했다. 기차가 연착되다 보니 밤에야 차에 타게 되였다. 손은 두 사람씩 줄로 묶었다.
이제 영복이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영복이는 집이 회령이어서 새벽에 먼저 기차에서 내렸다. 온성역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꼭 다시 만나자” 였다. 11월 17일 오전 청진역에 도착했다.
80명도 넘는 대열이니 오가던 사람들이 다 구경했다. 청진역에서 한 시간도 넘게 걸어서 라남(청진시 라남구역. 도집결소가
위치해 있다 - 편집자 註)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나에게 밥 사주던 할머니가 다시 과자 두 개를 주었다. 먹지 않고 보관했는데 나하고 손을 같이 묶은 할아버지가
몸이 너무 허약해서 걷기조차 힘들어 했다. 그래서 과자 한 개를 그 노인에게 주고 한 개는 내가 먹었다. 나중엔 할아버지
덕분에 할아버지와 나는 수레를 타고 집결소까지 가게 되었다. 집결소에 들어서니 11시 30분.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우리는 저녁부터 밥이 나온다. 남자는 남자 호실로, 여자는 여자 호실로 각각 심문을 끝내고 들어갔다.
집결소에도 규칙이 있었는데 아주 엄했다. 24시간을 1사람이 1시간씩 근무 서야 하며, 보안원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며, 저녁에는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근무를 서는 규칙은 선생이 문 밖에 왔을 때 “선생님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하고 소리치면 된다. 쇠창살을 지키는 근무도 마찬가지다. 저녁 식사는 6시이고, 밥은 역시 100g이
되나마나 하는 양에 소금 국물을 주는 것이 전부다. 저녁 7시부터는 공부시간이다.
아래는 그 안에서 외어야 하는 서약서이다.
이것을 날마다 공부했다.
그곳 반장은 백암(양강도 백암군) 사람이었는데 나를 많이 생각해주었다. 일할 때는 나보고 쉬면서 천천히 하라고 했고,
식사 시간에는 국물도 때마다 더 주고 밥도 4번이나 나를 더 줬다. 반장에게서 형 소식도 들었는데, 중국 ○○성 ××××시
□□□역에서 형을 만나서 얘기까지 나누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에 자기 집에 찾아오면 같이 형을 찾으러 가자고 했다.
마음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반장은 11월 29일 저녁에 백암으로 갔다. 가면서, 백암군 △△리 ××반 박○○를
찾으면 된다고 했다.
도 집결소에서 의형제를 맺은 형이 있는데 이름은 림수호, 생김새는 시원하게 생겼고 몸도 좋다. 그 형은 여동생 찾으러
왔다가 체포됐다고 했다. 나에게 잠자리에 누워서 자기 비밀을 다 말해주며 전화번호와 자기를 찾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림수호 형과는 크게 도움은 없었지만 서로 눈만 마주쳐도 기분 좋아서 웃곤 했다.
2003년 12월 9일 | 무산 노동단련대
12월 8일, 기차를 타기 위해 청진으로 이송될 때 림형은 화목지[화목(火木 ; 땔나무)를 만드는 곳. 노동단련대
수인들을 보내서 노동시키는 주요한 곳 가운데 하나다. - 편집자 註]로 간다고 했다. 그 곳에서 도주하여 중국으로
갈 것이라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청진역에서 12월 9일 새벽에 차를 타고 아침에 무산에 도착했다.
나는 쉼 없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은혜주신 것 감사하며 앞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후에도 어린애가 부모에게 떼를 쓰듯 내가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달라고,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무산에 도착해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내가 나이를 15살로 속이고 비법월경도 처음인 것으로 했지만 보안원들은
모두 사실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하여 5명이 ‘방랑자 숙소’로 가게 되였다. 내가 알고 있는 방랑자 숙소는
집, 부모 없이 떠돌이 하는 어린애들과 직업과 집이 없는 사람들이 잠시 생활하는 곳이다.
방랑자 숙소에서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그래서 방랑자 숙소를 택했던 것인데 숙소에 와보니 옛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숙소 지도원은 과거에 단련대 대장을 하던 사람으로서 비법월경자들을 악질적으로 다루는 사람이었다. 상무들은 세 명이
있는데 한 명에게 한 번씩 매 맞으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몽둥이찜질을 네 번이나 당하고 나니 온 몸이 다
쓰라렸다.
무산에 도착해서는 일이 척척 내 뜻대로 풀리는 것 같더니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일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에는 숙소
담당의사가 나를 보고 몇 마디 한 것이 지도원에게까지 가게 되어 그만 나의 거짓말이 다 들통나게 되였다. 그리하여
12월 9일 저녁, 실컷 맞고 나서 노동단련대로 이송됐다. 그곳에 들어서니 나의 소개를 하라고 했다. 이름, 나이,
범죄, 특기 등 여러 가지를 보여주어야 된다. 나는 있는 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단련대에서는 아침 6시 기상, 7시 식사, 저녁 6-7시 식사, 면회, 7-9시 오락 등으로 생활이 짜여진다. 오락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명하기’다. 한 번 지명 당한 사람은 노래, 두 번 지명 당하면 춤, 세 번째는
웃기기, 네 번째는 벌을 받는다. 단련대는 노동으로 죄를 씻는 곳이기에 보통 사람들보다 3분의 1이상의 일을 더 해야
된다. 하지만 겨울에는 일감이 없어서 나무 패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일이 힘든 것도 아니지만 빠른 시간 내에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2003년 12월 11일 | 도주 실패
12월 11일 저녁 식사 후 무사히 단련대 담장을 넘어서 도주했다. 한참 신나게 걸어서 가고 있는데 나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있었다. 머리를 들고 보니 단련대 상무였다. 할 수 없이 붙잡혀 다시 단련대에 들어갔다. 상무들은 나에게 욕이나
하고 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련대생과 반장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몽둥이로 1시간 정도 맞았고 그 후부터는
밤 12시까지 머리를 벽에 대고 서있어야 했다.
12시가 되어 다 자는데 한 근무생이 나보고 자리에 누워 자라고 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온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빨리 나갈 수 있을까? 노동을 아무리 열심히 해서 모범 퇴소 된다고 해도 네 달은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럼 나는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 일을 열심히 하고 생활도 잘하고 머리도 써서 삼촌들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했다.
2003년 12월 12일 | 근무를 서야 한다
밤새 잠 못자고 계획을 세웠지만 뜻대로 안 되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노동!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는데 일만은
남보다 더 잘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쓰고 힘써 일해도 남이 하는 것만큼 따라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정신은
좋은 데 몸이 허약하여,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단련대에서는 도주할 기회가 많지 않다. 편안하게 도주하려면 근무를
서야 된다. 하지만 근무는 나처럼 도주할 위험성이 있는 사람은 세우지도 않는다. ‘어떻게 하면 반장에게 잘 보여 근무를
설 수 있을까?’하고 항상 생각했다.
하나님께도 “길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몸은 점점 더 허약해지고 이제는 달릴만한 기력도
없고 걸음이나 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어느날 상무가 들어오더니 외지(外地) 작업을 가는데 나를 포함해 열 세 명은
그냥 남으라고 했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허약자와 병자들이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괜찮은 편이었다. 3일 동안 환자들과
어울리며 크게 인심을 얻었고 이제는 환자들이 나의 친구가 되였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무슨 일이든 다 나에게
얘기하곤 했다. 나도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고 항상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3일 동안 상무들에게도 호평을 받게 되었다.
2003년 12월 21일 | 기회
드디어 나도 근무를 설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12월 23일 | 도주
저녁 근무시간에 단련대생 한 명과 미리 약속해 두었던 터라 저녁 7시30분 경에 둘이서 함께 도주했다. 이번에는
무사히 도주해서 ×××까지 걸어갔다. 옛날에 알던 집 몇 군데를 돌았지만 누구 하나 식사 대접하는 집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형진이네 집을 찾았다. 형진이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신 분이고 더구나 혼자 사니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30분 정도
문을 두드리니 겨우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인사하고 들어가서 형진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랬더니 저녁식사는 했느냐고
물어보며 옥수수밥 한 그릇을 주었다. 그때 그 밥을 먹고 겨우 기운을 차렸다.
밤 11시쯤 되어 다시 ◇◇◇에 와서 친구 집을 찾았다. 친구 집에서 며칠 동안 편히 쉬고 12월 28일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처음 만난 친구지만 마음이 좋고 인정이 많아서 나를 보자마자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도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나를 자기집에 있게 했다. 내가 새로 만난 친구 이름은 강원호, 나이는 17살이고 체격은 나와 비슷했다.
원호네 집에서 사흘을 보냈다. 그 덕분에 이젠 몸도 많이 괜찮아졌다.
2003년 12월 30일 | 도강(渡江)
12월 30일, 드디어 중국으로 갈 길이 열렸고 길동무도 생겼다. 모두가 친구 덕분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그리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시리라 믿으며 하나님 앞에 나와 나의 동행자를 맡겼다.
12월 30일 밤 10시에 중국 △△△△△라는 마을 앞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조선 경비대와 이틀 후에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무사히 중국 땅을 밟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고생의 시작이었다. ○○○까지 하루 반 정도는 걸어야 하는데 나는
다리가 많이 상해서 걷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밤새 걸어서 ××××마을을 벗어나니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12월 31일 아침, 지친 몸으로 그 집에 들어갔다. 아침밥을 먹고
거기서 일을 하기로 했다. 12월 31일과 다음해 1월 1일을 그 집에서 땔나무를 해주었다. 다리가 아파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 였다. 속옷을 벗어서 제일 아픈 곳 세 군데를 천으로 싸맸다. 그러고 나니 고통이 조금 괜찮아졌다.
2004년 1월 1일 | 긴장
1월 1일 저녁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멀고 먼 길을 걸었다. 아픈 다리를 끌고 산속을 헤치며 걸어가다가 도로에 들어섰다.
이제부터 도로로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걸어가다가 자동차 불빛이나 소리가 나면 길 옆에 숨어야 했다. 도로 길에서 두
번이나 잡힐 뻔 했다. 그때마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도망쳤다. 밤새 걸어서 △△△초소를 에돌아 무사히 초소를 지났다.
이제 6시간만 걸으면 ×××××에 들어서게 된다. 이젠 나의 옷이 문제였다. 조선 옷과 조선 신발 그대로 였다. 길을
가다가 마침 어떤 마을 쓰레기장에서 바지와 웃옷을 좋은 것으로 주워 입었다. 그리고 같이 오던 애와도 헤어졌다.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그 애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2004년 1월 2일 | 눈물
오전이 되자 지치고 지쳐서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 도로 옆에 누워 추운 줄도 모르고 잠들어 버렸다. 꿈 속에서
낯 모를 삼촌이 빵을 3개 주며 먹으라고 했다. 그것을 입 속에 넣는 순간 요란한 소리 때문에 눈을 떴는데 큰 짐차
하나가 지나갔다. 기운을 내서 또 걷기 시작했다.
오후 1-2시경 △△△△△시내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제부터 ××××까지 가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골목길을 돌고
돌며 택시기사에게 ○○○○까지 가자고 했는데 나의 옷차림과 얼굴을 보고는 안 가겠다고 하며 “먼저 돈을 주면 가겠다”고
했다.
저녁에 6시쯤, 작은 가구공장 안에 들어가 창고에서 불을 피웠다. 너무 춥고 배고프고 힘이 없어서 아마도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조금 후에 경비원인 한족 아저씨가 나와서 마구 욕을 하며 창고에서 나가게 했다. 아마도 창고에서
화재사고가 날까봐 그런 것 같다. 나는 지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한족말로 “나는 집도 없고 부모도 일찍 돌아가서
친척집에 왔다가 길을 잃어 이렇게 됐다”고 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나가라고 소리쳤다. 내가 “□□□□에 전화를 하면
이모부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말을 했더니 그럼 전화를 하라며 경비실로 데리고 갔다. 생각 밖으로 일이 잘 풀려나갔다.
그리하여 전화연결을 해서 □□□□에서 택시를 타고 사람이 왔다.
한족 아저씨는 나를 끝까지 데려다 주었다. 택시를 타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그 동안 고생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혜라고 나는 믿는다. 택시 안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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