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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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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포전은 나의 포전
최형민(가명, 38세)씨와 민정옥(가명, 66세)씨는 현재 중국 ○○시 외곽의 한 마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다. 따라서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보낸 특무(스파이)가 탈북자들 사이에 잠입하여 고발, 체포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 그런 사례가 몇 건 있었다)
서로를 잘 믿지 않는다. 자신이 북한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특히 잘 말하려 하지 않는다. 아래 인터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다른 탈북자 인터뷰와는 다르게 단답형으로 짧게 답변하고 있으며, 개인신상과 관련해서는 잘 답변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며, 이제 두 사람과의 대화를 시작해보자.
두 분 고향은 어디이십니까?
최형민(이하 ‘최’) : 『함경북도 무산군 ○○리입니다.』
아주머니는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민정옥(이하 ‘민’) : 『66세입니다.』
나이보다 많이 젊어 보이십니다(다같이 웃음). 고향은 어디십니까?
민 : 『○○입니다. 어렸을 때, 전쟁 때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함경북도 새별군 ○○리에 살고 있습니다.』
계속 거기서 사셨습니까?
민 : 『아닙니다. 옮기고(이사하고), 옮기고 했습니다.』
어느 도시에 살아보셨습니까?
민 : 『회령에 살아봤고, 무산에도 살아봤습니다.』
아저씨는 북한에 계십니까?
민 : 『아닙니다. 돌아간 지 오랩니다. 한 15년 됐습니다.』
자녀는 몇 분을 두셨습니까?
민 : 『딸이 두 명 있는데, 연락이 없습니다. 어디에 갔는지 찾지 못하겠습니다. 아들 한 명은 조선에 있습니다.』
자식들은 다 결혼을 했습니까?
민 : 『예. 딸 둘은 여기(중국)에 들어 왔는데 어디에 시집갔는지, 팔려갔는지 찾지 못했습니다. 애가 하나 있습니다.』
손자를 데리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민 : 『예.』
손자는 몇 살입니까?
민 : 『12살인데, 우리 처지가 이렇다 보니 학교도 못 갑니다.』
이런 사례는 중국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국경을 넘은 북한 여자들은 일단 인신매매꾼들의 표적이 된다. 아이를 데리고
탈출한 여자도 가리지 않는다. 강제로 끌고 가기도 하고, 좋은 일자리를 소개시켜주겠다거나 안전한 피신처를 제공해주겠다는
식으로 꼬여 데리고 간 후 2차 인신매매꾼에게 팔아버린다. 매매가는 중국 인민폐 2000원 정도부터 최고 2-3만원까지
한다. (이에 대해서는 Keys 34호 - 2003년 5월호를 참조할 것.) 그래서 민정옥씨네 가족의 사연처럼 엄마 없는
아이들이 많다. 함께 인터뷰한 최형민씨도 아내 없이 혼자서 자식을 키우고 있었다.
나이 어린 탈북자들의 교육도 문제다. 학교에 보낼 수 없고, 부모가 한글 정도만 가르치려고 해도 교재가 없다. 필자는
일전에 19살 나이의 탈북청소년을 만난 적이 있는데 부모를 잃고 꽃제비(거지)가 되어 방랑생활을 한지 10년이 되어 전혀
교육의 혜택을 받아보지 못했다. 글을 읽는 것은 대강했지만 쓰기는 거의 못했고, 셈도 덧셈 뺄셈 정도만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는 영특해 기억력이 비상했고, 자라온 환경 탓에 대단히 눈치가 빨랐다.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모습이었다.
북한에서는 언제 나오셨습니까?
민 : 『작년(2002년) 8월에 나왔습니다.』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경험은 없습니까?
민 : 『없습니다.』
두만강은 어떻게 건넜습니까?
민 :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건넜습니다.』
경비대원들에게 돈을 주고 건넜습니까?
민 : 『돈이 없어서 주지 못하고 그냥 건넜습니다.』
북한을 탈출하게 된 무슨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습니까?
민 : 『생활이 곤란하니까……. 여기(중국)오니까 우린 있던 데(북한)보다 생활이 일 없더란(괜찮더란) 말입니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민 : 『아이들 옷도 얻어 입히고 좀 살만한데, 여기 있자니 말(중국어)도 모르고……. 잡혀가기만 하면 우린 죽는단 말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가 좀 도와 드리겠습니다.
민 : 『일을 하지 못하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가을에 농사일을 거들어 주면서 먹을 것을 조금 구입했는데 지금은…….』
북한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민 : 『담배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담배를 생산하면 어디로 가져갑니까?
민 : 『농장에 제대군인들을 배치해서 담배농사를 하는데 모두 군대에 공급합니다.』
거기 농장에서는 백도라지(아편)를 하지 않았습니까?
민 : 『그런 건 깊은 산골에서 심습니다.』
아들이 북한에 있다고 하셨는데, 거기서 직업이 무엇입니까?
민 : 『농사일도 하고……. 너무 살기 바쁘니까 두부장사 하고, 음식도 해서 팔고, 술도 만들어 팔고, 이런저런 장사를
해서 살아갑니다.』
음식은 장마당에 내다 팝니까?
민 : 『장마당에 가고, 동네를 돌면서 팔기도 하고.』
그렇게 장사를 하면 하루 벌이가 얼마쯤 됩니까?
민 : 『반 킬로그램 정도 됩니다.』
반 킬로그램이라뇨?
민 : 『그러니까 강냉이 한 근 정도입니다.』
최 : 『그때 가격으로 하면 강냉이 값이 60~70원 정도입니다. 지금은 강냉이 한 킬로그램에 200~250원 정도 합니다.』
민 : 『장사를 해서 뭘 팔아도 (물가가 너무 올라) 들어오는 게 없단 말입니다.』
주로 음식과 관련된 장사를 하신 것 같은데, 그런 재료는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민 : 『밭에서 콩 이삭주이 같은 것을 해서 조금씩 모아둡니다.』
‘이삭주이’는 어떻게 하는 거죠?
최: 『이삭주이라는 게 사실대로 말하면 도둑질입니다. 아무리 선동원들이 지켜도 새벽이면 이삭주이를 하는 척하면서 한 10킬로그램씩
도둑질해 갑니다. 우리나라(북한)에서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니까 잡히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자. 북한의 국영농장에는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라는 선전구호가
붙어있다. 이것은 농장의 밭과 곡식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라는, 주인의식을 독려하는 구호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것을 ‘국영농장의
작물은 어차피 주인이 없는 것이니 곧 나의 것’이라는 의미로 바꿔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국영농장의 곡식을 훔쳐내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죄의식이 없다. 특별히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씨의 말대로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이 닿게 된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장사를 꾸준히 해왔으면 그래도 살림이 좀 괜찮지 않았습니까?
최 : 『장사를 하다 보면 불량배들도 있고, 또 할머니들이 장사를 하는 경우에는 외상으로 먹고 돈도 주지 않습니다. 술은
집에서 강냉이로 고아 파는데 그걸 안전부에서 알면 빼앗고 하니까…….』
최근 들어서 장사하기가 더 힘들어졌습니까?
민 : 『네, 지금 수지가 안 맞습니다.』
그 동안 장사를 해오시면서, 어느 해가 가장 잘 되었던 해입니까?
민 : 『저는 1994년, 1995년도에 제일 잘됐습니다. 그때 곰취(산나물의 일종)를 캐다가 팔았는데, 중국에서 많이
가져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돈을 좀 벌었습니다.』
1994년, 1995년도면 다른 북한 사람들은 가장 어려웠던 때가 아닙니까?
민 : 『그때는 그래도 내가 힘이 있으니까 돌아다니며 벌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살기 바쁩니다. 장사를 하면
뺏기지, 소토지(小土地)를 해도 세금을 내야 합니다. 지금은 전기세까지 다 받습니다. 모든 게 다 비싸지고…….』
세금은 언제부터 받았어요?
민 : 『작년부터 받습니다.』
얼마나 받습니까?
민 : 『전기를 보내든 안 보내든(전기가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세금은 똑같이 받습니다.』
한 달에 얼마나 냈습니까?
민 : 『한 달에 200원씩 냈습니다. 전기세, 물세 다 합해서 200원입니다. 전기도 물도 보내 주지고 않으면서 받아갑니다.
우리 살았던 데는 전깃불을 보지도 못합니다.』
세금 낼 돈은 있었습니까?
민 : 『세금 낼 돈이 어디 있습니까? 장사를 하든 뭘 하든 벌어서 내라고 자꾸 독촉만 합니다.』
누가 세금을 받아갑니까?
민 : 『동사무소에서 세금을 관리하는데가 있습니다. 인민들의 세금을 관리하는 부서가 따로 있습니다.』
최 : 『그런 데(세금을 관리하는 부서)는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작년부터인가……, 소토지 하는 거 세금을 내라는
방침(김정일의 지시)이 내려오면서 생겼났습니다.』
북한에서 식구 중에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있나요?
민 : 『사위가 죽었습니다. 거기에 전염병이 퍼졌단 말입니다.』
어떤 병이었어요?
민 : 『병명이 잘 생각 안 납니다. ‘파르’ 뭐라고 하던데……. 집 식구들이 다 옮아서 앓았단 말입니다.』
혹시 파라티푸스가 아니었나요?
민 : 『예. 맞습니다. 그 병입니다.』
첫째 사위가 죽었습니까?
민 : 『첫째, 둘째 사위 다 죽었습니다. 약이 없어 써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파라티푸스는 소화기 계통의 급성전염병이다. 고열을 동반하여 전신이 쇠약해지면서 드러눕게 된다. 항생제를 투약하고 환자를
격리시켜 확산을 막으며 주변 위생을 청결하게 하면 그리 치료가 어려운 병이 아니지만 북한에서는 이 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북한에서 파라티푸스가 특히 창궐하였던 때는 1996년과 1997년이었다.
999년까지의 아사자(餓死者)중 상당 수는 먹지 못해 허약한 상태에서 파라티푸스균이 침투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염성이 강해 가족 중 한 명이 걸리면 모두 옮게 된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도 파라티푸스에 걸려 본 적이 있는 탈북자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파라티푸스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사과 한 알만 먹어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뭐든지 팔아서 사과 하나만 먹고 죽자고 집안을 뒤졌는데
가진 것은 이불 한 채뿐이어서 결국 먹지 못했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를 했던 식당에서 사과가
후식으로 나오자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옆 집이 며칠간 조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식구가 모두
파라티푸스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어느 탈북자에게서 들었다.
중국에 와서는 어떻게 생활하셨습니까? 친척이라도 있었나요?
민 : 『△△△△라는 마을에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는데 밥도 주고 옷도 줍디다. 중국에 친척은 없습니다.』
마을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하지는 않았습니까?
민 : 『아이도 있고 하니 불쌍하다고 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중국말을 모르는가 하고 물어보면 생활이 곤란해서
공부하지 못해서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더 묻지 않습디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민 : 『빈집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가을에 농사일을 도와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하였는데, 노임은 제대로 주던가요?
민 : 『예. 하루에 20원 줍디다. 한 600원 정도 벌었습니다.』
얼마나 일하셨습니까?
민: 『한 달간 일했습니다. 그 돈으로 부식물은 없이 쌀만 사서 먹는단 말입니다.』
최형민씨는 언제 북한을 나왔습니까?
최 : 『작년(2002년) 10월에 왔습니다. 그전에 한번 왔다가 잡혀 나갔습니다.』
언제 잡혀 나갔습니까?
최 : 『재작년(2001년) 3월에 왔다가 7월에 잡혔습니다.』
어떻게 잡혔습니까?
최 : 『숙박 검열하는데, 말(중국어)을 모르니까 잡혔습니다.』
북한에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최 : 『농장원이였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되어 농장원으로 배치 받았습니까?
최 : 예. 『군사복무는 황해남도 해주시 ××××잠복초소에서 했습니다.』
군 제대는 언제 하셨습니까?
최 : 『1992년도에 제대됐습니다.』
손은 왜 그렇게 되셨어요? (최형민씨는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최 : 『군대에 있을 때 훈련하다가 총탁(개머리판)에 맞아 못쓰게 됐습니다.』
그러면 조기 제대된 것입니까?
최 : 『아닙니다. 만기제대 했습니다.』
많이 아팠겠는데요?
최 : 『초소경비를 설 때 조금 단축하는 식으로 참아왔습니다.』
중국으로 넘어올 때 어디 쪽으로 해서 왔습니까?
최 : 『△△△으로 해서 건넜습니다. 야밤에 몰래 도강했습니다.』
강을 건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최 : 『살기 바빠서 도강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중국에 도강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국에 가면 살길이 있겠다 하고
중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 넘어오니 먹는 건 그런 대로 먹는데 밖에 나가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니 불안합니다.』
혼자 넘어 오셨습니까?
최 : 『둘이서 같이 넘어 왔습니다. 그 동무는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중국 ***에 친척이 있어 찾아간다고 갔는데 통
연락이 없습니다.』
부인은 북한에 있습니까?
최 : 『아내는 미공급이 되니까 1998년도에 집을 나갔는데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애는 내가 책임지고…….』
혹시 중국에 오지 않았을까요?
최 : 『글쎄, 모르지요. 중국에 와서 시집을 갔는지, 팔려갔는지…….』
미공급 시기에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최 : 『산에 가서 약초뿌리랑 캐 먹고, 막말로 말하면 도둑질이나 해먹고 살았습니다.』
농장에는 나가지 않았습니까?
최 : 『농장에 나가 일해 봤자 20원이나 주나 마나 하고, 또 배급도 안주고…….』
소토지 같은 것은 안 가꾸셨습니까?
최: 『혼자니까 그저……, 농태기(집에서 만든 술)같은 거나 얻어 마시고 남의 일을 해주는 식입니다.』
남의 일을 해주면 주는 것이 좀 있나요?
최 : 『없습니다. 그저 식량이나 조금 가져다 주고…….』
중국에 와서는 생활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최 : 『처음에는 교회에 찾아가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집을 구해주고 집세도 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탈북자들이)
너무도 많이 와서 교회에서 주는 돈으로 나가서 술 먹고 싸움질도 하고 해서 이제는 교회에서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노무시장(노동시장)에 가서 막일도 하고 농촌에 가서 김도 매고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일을 하면 돈은 제대로 주나요?
최 : 『마음이 고운 집들은 돈을 제대로 주는데 그렇지 못한 집들은 돈이 없다고 이래저래 구실을 붙입니다. 그런 집들에서는
부식물이나 쌀 같은 걸 좀 달라고 해서 가져옵니다.』
겨울에는 어떻게 합니까?
최: 『겨울에는 아파트 같은데 석탄을 날라주는 일거리 같은 것을 찾아 다니며 합니다. 그런 것도 없을 때는…….』
아이는 지금 몇 살입니까?
최 : 『여덟 살입니다.』
이제 학교에 보내야 할 나이 아닙니까.
최 : 『배워야 하겠는데, 글쎄 내 나라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데 우리는 탈북자들이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 끙끙 앓을 뿐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며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말로는 기도를 하면 모든 일이
풀어진다고 하지만…….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최 : 『우리는 앞으로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남조선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남조선에 가서 기술 같은 것을 배워서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민 : 『저도 그렇습니다.』
중국에 취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여권을 갖고 해외까지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 이들에 비하면 얼마나 사치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빈 자리가 보이는 날에는, ‘저 자리에 탈북자 한 명 태워서 보내주면
안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방도도 없을 뿐더러 그런 일을 하지 않는 필자로서는
그저 안타깝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되돌아올 뿐이다. 언젠가 한 탈북자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비행기
꼬랑지라도 잡고 한국으로 갈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일단 먹을 것을 찾아 중국으로 오지만, 그것이 충족되면 ‘자유’를
찾는다. 재중 탈북자들은 그 자유의 이상향을 한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지 말고, 북한 자체를 자유의 낙원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남한에 탈북자들이 너무 많이 온다고, 그래서 정착금 같은 것으로 국가 재정이 많이 빠져나간다고 투덜대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북한민주화운동에 참여하자, 그것이 곧 당신이 싫어하는 ‘탈북자의 남한행’을 막는 길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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