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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周逸의 북한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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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
◆ 프롤로그 - ‘관상용’ 짐승들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정일 최고사령관께서는 조선인민군 제821군부대직속
3대혁명붉은기중대와 ‘4월16일염소목장’을 시찰하시였다.
… (중략) … 최고사령관께서 두 번째로 찾으신 ‘4월16일염소목장’은 기술장비에 있어서나 규모에 있어서 당당히 자랑할만
한 선군시대의 창조물의 하나이며 전군에 널리 알려져 있다. 목장에서는 해마다 많은 염소젖과 치즈, 빠다, 요그르트를 비롯한
젖가공제품들을 생산함으로써 군인들의 식생활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김정일 최고사령관께서는 목장에서 생산한 갖가지 제품들을 보신 후 생산정형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목장을
비롯한 도처에 건설된 현대적인 염소목장들에서 젖생산을 정상화함으로써 군대와 인민이 지금 그 덕을 크게 보고 있다고 하시면서
이 자랑찬 현실은 염소를 대대적으로 기를데 대한 우리 당정책의 정당성과 그 위대한 생활력에 대한 뚜렷한 실증으로 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 기사는 지난 8월 1일 평양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내용이다. 기사에 따르면 이날1) 김정일은 먼저 제821부대 직속
중대에 들러 화력복무훈련(대포 지휘 및 운용에 대한 훈련)을 참관한 후 늘 그랬던 대로 쌍안경과 자동보총을 기념으로 주고
기념사진을 촬영 한 후, ‘4월16일염소목장’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김정일은 지난 6월 13일에도 황해북도 봉산군 염소종축장을 현지지도하였고, 6월 17일에는 황해남도 선원군 계남목장을
현지지도하여 “염소, 토끼, 돼지들이 욱실거리는 축사들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4월16일염소목장’ 방문은 2001년
4월 16일, 2001년 9월 12일에 이은 세 번째 시찰이다.
북한은 종종 이런 식으로 김정일의 농목장(農牧場) 방문 사실을 보도한다. 김정일은 인민군 군부대나 농장, 기관 기업소를
시찰할 때마다 거기에 부설된 염소목장, 닭공장 등 농목장을 찾는다. 이러한 보도만 보자면 김정일이 마치 주민들의 식생활에
크게 관심이나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오판이다.
그것은 오히려 북한 주민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군부대나 농장, 기관 기업소의 농목장에서 사육하는 염소, 토끼, 게사니(거위)와
같은 가축들은 고기생산을 위한 가축이 아니라 김정일 일개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관상용(觀象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관상용 짐승을 돌보기 위해서 주민들이 죽어난다.
김정일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판에 참으로 ‘통이 크게도’, “영양가 높은 고기와 우유를 먹이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며, 더구나 그것을 자랑스러운 듯 대외적으로 선전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위 기사에서 이야기한 “염소젖과 치즈, 빠다, 요그르트”를 먹어본 북한 주민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치즈, 빠다는 고사하고 지금 북한의 축산정책은 한마디로 ‘사람들은 굶겨 죽어도 짐승들을 대대적으로 살리라’는 식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은 김정일은 내내 “풀만 먹여서 짐승들을 살리라”고 말하고 다닌다. 매번 이 코너를 통해 이야기했지만
북한에서 김정일의 지시란 곧 절체절명의 ‘법칙’이다. 어느 누구도 이에 거스를 수 없으며, 어느 법보다 우선이다.
생물학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식동물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알곡사료를 먹이지 않으면 정상적인 발육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등 다양한 필수영양소를 섭취하는 데 알곡사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흔히들 세계적인 목축업의 선진국으로 스위스를 꼽는다. 목초가 풍부한 스위스라 할지라도 초식동물을
사육하는데 있어 60% 이상의 사료를 알곡으로 먹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의 김정일은 도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얘긴지, 기어코 풀만 먹여서 고기를 생산하라고 강박한다. 북한의 축산업을
담당하고 있는 전문가와 주민들이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나서서 말하고 싶어도 바른말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대놓고 말은 못한 채, 자신들은 굶으면서도 염소와 같은 짐승들에게 알곡을 먹이며 정성스럽게
키우려고 노력한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말도 안되는 “풀과 고기를 바꿀 데 대한 방침”(풀로만 짐승을 사육할 데 대한 방침)이 어떻게 하여
나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수령독재사회의 실태를 독자 여러분에게 알리고 공감하고자 한다.
◆ “초식동물을 사육하라”면서 “돼지, 닭공장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라”던 김일성
돼지가 풀을 먹겠다고 합데?
북한에서 ‘풀과 고기를 바꿀 데 대한 방침’은 이미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에도 그러했지만, 김일성이
1962년 8월 평안북도 창성군 ‘지방 당 및 경제일꾼 창성 연석회의’에서 지시를 하면서 이 방침이 확고해진다. 즉 “산을
낀 고장에서는 산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창성군에서는 풀 먹는 집짐승을 많이 길러 풀과 고기를 바꿔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김일성의 지시대로 풀과 고기를 바꾸자면 소, 양, 염소, 토끼와 같은 초식동물을 대대적으로 사육해야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돼지목장과 닭공장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도록”하는 모순된 지시를 내린다. 돼지와 닭이 풀을 먹고 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당시의 사회풍경은 70년대에 북한에서 제작된 <이 세상 끝까지>라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에는
풀과 고기를 바꾸라고 하면서도 돼지사육을 장려한 김일성의 지시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모순점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노동당의 축산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태성 할머니’를 소개한다. 북한에 널리 알려진
‘태성 할머니’란 1956년경 당내에서 경제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적 대립으로 비화되고 있었던 시기, 김일성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주었다고 해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당시 당 내에서는 개인숭배와 당 내 민주주의 문제를 놓고 주류와 반대파간의 노선·권력투쟁이 한창이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한참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김일성이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지금의 남포시 강서구역 태성리)의 농촌 길을 지나다 한
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가 김일성에게 이런 말을 했다.
“수상님, 나쁜 놈들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우리는 수상님만 믿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일성은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 이후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최창익을 비롯한 정적들을
쓸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에는 반당(反黨) 종파분자들을 가두는 정치범 수용소가 생겨났다. 또 한편으로는 반종파(反宗派)투쟁을
통하여 ‘유일적 지도체계’가 구축되는 계기가 됐다.
김일성은 그 할머니를 두고두고 회고하며 우상화 교양 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영화가 제작되자 모든 주민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며
‘영화 실효모임’(영화를 보고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살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모임)을 진행하도록 했다. 영화는, 할머니의
며느리를 비롯한 온 가족이 당의 축산정책을 시비하고 나서는 종파분자들과 견결히 투쟁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종파분자는 농산국장(農産局長)이다. 농산국장은 풀과 고기를 바꿀 데 대한 김일성의 지시를 음으로 양으로
반대해 나서는 반당 종파분자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태성농장의 회의를 지도하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돼지가 풀을 먹겠다고 합데?”
당의 축산정책은 ‘풀과 고기를 바꾸라’고 하면서도 돼지 사육을 장려하고 있으니, 한 개 도(道)의 농축산업을 책임진 농산국장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농산국장이 말이 맞다. 돼지가 어찌 풀을 먹고 살겠는가? 많은 주민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저 말은 맞는 말인데’하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농산국장을 당의 축산정책에 도전하여 나선 종파분자로 내몬다. 영화는, 김일성에게 도전하여 나선 사람은
종파분자로 분류되어 숙청 당하고야 만다는 경고 메시지를 강력히 담고 있다.
김일성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면 그게 진실
이 같은 현상은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축산일꾼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들에서 실지로 벌어졌다. 한 예로, 김일성이 1959년
강계 수의축산대학을 현지지도한 후, 대학 내에 대대적인 검토와 숙청 바람이 불었다.
당시 교직원들은 대학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풀과 고기를 바꿀 데 대한 당의 축산정책을 관철하자면 초식동물을 사육하는 데
중심을 둬야 한다”고 용기 있게 제기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여전히 돼지목장, 닭공장(닭사육목장) 건설만을 뇌까렸다.
풀 사료를 잘 가공하면 돼지와 닭도 얼마든지 사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에서 배합사료 생산시설은 너무도 낙후했다.
그런데 알곡사료도 없이 풀만 가지고 잡식성 가축을 사육하여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니,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김일성은 대학의 현지지도를 마치고 평양으로 귀가하면서 대학 학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학장동무, 대학 내에 나쁜 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들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기술인재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돌아간 후 학장은 “사상투쟁을 벌여 나쁜 놈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라”고 지시했다. 이후 대학생, 교직원을 대상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상투쟁이 벌어졌다. 낮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강의실과 강당에 모여 비판하고 비판받는 정신적 고통을
주다가, 출학(퇴학), 교직원 해임 등 가혹한 처벌이 이어졌다.
어느 기생충학 교수는 실수로 병원체의 학명(學名)을 반대로 표기했다는 것이 문제시되었다. 대학 당위원회에서는 고의적인
행동이라며 비판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그리고는 교직원, 학생들의 비판무대에 내세웠다가 해임시켰다. 일부 교직원, 학생들은
사상투쟁 과정에서 ‘신의주 학생 사건’에 관계됐다는 꼬투리가 잡혀 더욱 혹심한 처벌을 당했다. 낮에는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기숙사 호실에 감금했다가 밤이면 코피가 철철 흐르도록 재우지 않고 사상투쟁을 해댔다.
‘신의주 학생사건’은 1945년 11월 23일 북한의 공산화를 위해 강압정책을 펼친 소련군정, 강간과 약탈 등을 일삼는
소련군의 만행에 분노하여 신의주 학생들이 일으킨 항쟁을 말한다. 이로 인해 23명이 피살되고 7백 명이 넘는 이들이 부상당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인사들이 궐기를 배후 조종하고 교사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대학 당위원회에서는 이런 10여 년
전의 사건을 또다시 들춰내어 관련자, 교직원들과 학생들을 괴롭혔다. 사상투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상투쟁에서
출학, 철직의 처벌이 결정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시, 교직원, 대학생들은 공포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위와 같은 과정에서 다행히 살아남은
교수들은 대학생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공포심을 안겨주며 교육한다. 김일성의 사상과 의도에 조금이라도 도전하면 집단적으로,
조직적으로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면
둥근 지구도 평평하게 만들고, 그에 따른 온갖 말도 안 되는 과학적 근거를 만들어내야 ‘충신(忠臣)’의 소리를 듣는 곳이
북한이다.
하여간 그 이후부터 북한의 축산정책은 외면상으로는 풀과 고기를 바꾸는 것을 축산정책으로 내세우고, 내면상으로는 돼지 사육,
닭 사육 등 알곡사료가 위주인 집짐승을 사육해왔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염소, 양과 같은 초식동물들의
종자는 북한에서 거의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정일이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풀 먹는
집짐승을 대대적으로 사육하라”는 것이다.
◆ 먹을 강냉이도 없는데 “‘뉴질랜드식
현대 풀판’을 도입하라”던 김정일
뉴질랜드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쏘냐!
김정일이 김일성의 모순된 지시의 문제점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물론 아니다. 여기에는 김일성보다 더 허무맹랑한 이유가 담겨있다.
1990년에 초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뉴질랜드식 현대 풀판’을 만들어서 풀 먹는 집짐승을 사육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게 된 계기는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끝나고 나서다.
김정일은 세계청년학생 축전 이후 재정(財政)총화를 진행하면서 고기 수입에 수많은 자금이 들었다는 보고를 듣게 됐다. 실태는
이러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대한민국에서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세계 사람들에게 ‘김일성, 김정일이 영도하는
북한은 잘 사는 사회’라는 허위선전을 하기 위해 억지로 유치한 행사였다. 그러자면 여기에 참가하는 외국인들을 잘 먹여야
했다. 외국인들을 잘 먹이자니 고기가 문제였다. 각 지방의 돼지목장, 닭공장에서 생산한 고기들을 있는 대로 모두 평양으로
끌어왔다. 그러나 방문객들에 비해 수요는 턱없이 모자랐다. 또 외국인들은 돼지고기보다 소와 같은 초식동물의 고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소고기가 상당히 많이 필요한데 북한은 오래 전부터 돼지, 닭 중심의 축산정책을 펼치다 보니 소 같은 초식동물이
얼마되지 않았다. 원천이 아예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일꾼들은 수많은 재정을 투자하여 쇠고기를 수입했다.
김정일은 해당일꾼들에게 그 많은 쇠고기를 어느 나라에서 수입했는가 하고 물었다. 일꾼들은 뉴질랜드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김정일의 눈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초식동물들을 사육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김정일은 농업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실무일꾼들을 파견하여 당장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지시대로 농업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3명의 실무일꾼들이 뉴질랜드를 방문하고 농목장의 건립과정을 촬영한 비디오와 함께 그 결과를 보고했다.
보고내용은 이러했다. 뉴질랜드란 나라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세워진 나라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자 200여명을 원주민들만 살고 있는 어느 섬으로 추방해버렸다. 섬에 버려진 200여명의 영국인 범죄자들은
빈손으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다. 범죄자들 속에서는 자연히 생존을 지휘할 수 있는 지도자가 생겨났고 나름대로 조직체계도
세워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것을 생산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들에게 있는 재능이란 영국 사회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목축업이 전부였다. 따라서 목축업으로 생존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섬의 자연 지리적 조건은 목축업을 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못되었다. 화산분출지대로, 사방이 석회암으로 뒤덮인
자연 환경이었다. 따라서 풀이 자라날 만한 곳이란 시냇가 기슭뿐이다.
죄인들은 역경(逆境)을 순경(順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풀이 자랄 수 있는 시냇가 기슭에 부식토를 퍼날라서
풀씨를 심어 풀판 면적을 늘여 나갔다. 가축 종자는 원주민들에게 노략질하여 확보해 나갔다. 그 후 50년 후에는 첫 생산물까지
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뉴질랜드는 특이한 가축방목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직접 초식가축들을 몰고 다니며 방목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개들을
훈련시켜 방목에 이용하였고, 방목공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사냥개들을 지휘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현대 풀판’ 조성도
혁신적이다. 방목지가 선정되면 헬기로 기름을 분사하여 재래종 풀들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개량종 풀씨를 새로 심는다. 방목지는
구획을 정하고 순환식 돌림으로 가축들을 방목시킨다. 이렇게 하여 뉴질랜드가 세계적인 축산물 생산·수출기지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 김정일이 보낸 조사단의 보고 내용이었다.
김정일은 너무도 흥분하여 북한에도 당장 뉴질랜드식으로 현대 풀판을 만들고 초식동물을 사육하라고 지시했다. 뉴질랜드는 어떤
나라인가? 뉴질랜드는 태평양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좁고 긴 나라로, 두 개의 주요 섬과 수많은 부속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총 면적은 270,000㎢로 일본이나 영국과 비슷한 섬나라다. 쿡 해협을 경계로 남섬과 북섬으로 나누어져 있다.
총 인구는 370만 명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굶어죽은 북한 주민 350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숫자다.
대표단의 보고에서 뉴질랜드는 200년 전에 세워진 나라라고 했듯이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최초의 정착민인 마오리족이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에 뉴질랜드 북방의 여러 섬에서 카누를 타고 와 정착했다. 유럽인으로서는 1642년 네덜란드
항해자 아벨 태즈먼이 최초로 남섬의 북부에 있는 넬슨의 북서쪽에 위치한 골든베이에 정박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50년
전의 일이다. 초창기 뉴질랜드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시아인들도 있는데, 이들은 19세기 뉴질랜드에서 발견된 금을
좇아 이 곳으로 건너왔으며, 그 후 아시아계는 뉴질랜드 인구 구성의 중요한 한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뉴질랜드는
이주민들로 세워진 이민국가이다. 주산업은 목축과 낙농업, 임업 및 수산업이고 제조업은 아주 미비한 상황이다.
김정일은 자기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이런 조그만 국가가 세계적인 농축산기지로 변하는데, 2,000만 주민들과 12만 2762㎢의
면적을 거머쥔 자기의 독재국가에서 못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전국적인 범위에서 풀 먹는 집짐승 사육을 장려하는 선풍이 불었다.
먼저 시작된 것은 시범단위 설정 및 전국적으로 풀씨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국가 농업위원회에서는 강원도 세포군, 평안남도
신양군, 황해도 신계군, 함경북도 선봉군(현재는 라진 선봉시) 등 뉴질랜드의 자연, 지리조건과 비슷한 4개 지역을 시범단위로
설정했다.
풀씨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채집했다. 풀씨 채집은 북한 당국이 흔히 적용하는 상투적 수법을 적용했다. 풀씨를 채집해오는
주민들에게만 식량 절지표(배급표)를 공급해주는 식이다. 주민들은 절지표를 공급받지 못하면 식량공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풀씨 채집에 나서야 했다.
풀씨 수집에는 그 어떤 기술적인 대책도 없다. 주민들은 여문 풀씨, 안 여문 풀씨 가리지 않고 마구 채집해서 바쳤다.
길가에서, 들판에서 아무런 잡풀씨나 마구 털어다 바쳐대는 판이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모아들인 풀씨는 풀판 조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주민들로부터 억지로 풀씨를 수집한 해당기관에서 그대로 방치한 채 쓸모 없이 썩혀 버렸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봐도 국내에서 수집한 풀은 전혀 개량되지 않은 잡초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료용으로 이용하기에는 곤란했다.
국내에서의 풀씨 수집이 실패하자 국외로 눈길을 돌렸다. 김정일은 당조직을 통해 무역일꾼들이나 외국 공관에 “풀판 조성을
위한 개량종 풀씨를 수입해 들여오라”고 지시했다. 풀씨 수집에 열을 올렸으나 다음으로 전문 기술인력을 배치하는 것이 문제였다.
김정일은 기술인력을 수의축산대학 졸업생들로 배치하라고 당기관에 지시했다. 따라서 수의축산대학 졸업생들에 대한 무리배치(연고지나
희망에 관계없이 졸업생들을 한꺼번에 배치하는 것)가 실시됐다. 대학졸업생들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모여 앉은
곳마다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우리가 가축도 없고 교통도 불리한, 사람살기 어려운 곳으로 배치되자고 10년 동안 공부했단 말인가? 우리가 추방민(追放民)이란
말인가? 우리가 죄인이란 말인가?”
북한에서 추방민이란, 가장이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거나, 출신성분이 불량한 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자 등 정치적,
경제적 범법자들의 가정을 말한다. 이들을 사람이 살아가기 어려운 산골 농촌, 탄광, 광산으로 이주시킨다. 독재대상자들의
가족들에게 연좌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실정에 비춰볼 때 수의축산대학 졸업생들의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남한에서는 거의 모든 주민들이
대학졸업생 이상의 인텔리들이다. 그러나 북한에는 이제야 겨우 200만 인텔리들을 양성했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인텔리로
꼽힌다. 그런데 오랜 시간 정규대학 학부과정을 마친 인텔리들이 간부로 승진하지 못하고 두메산골의 생산현장에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범법자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다. 김정일의 지시는 수의축산대학 졸업생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졸업생들은 거역할 수 없는 김정일의 지시라 해도 무언의 항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남한처럼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사회라면
똘똘 뭉쳐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한판 시위라도 벌였을 것이다. 몇 년 전 남한에서 의약분업에 반대하며 의사들이 총파업을
불사하던데, 북한이 민주사회라면 충분히 이러한 시위가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 사회에서 입을 잘못 벙긋했다가는 곧장 정치범 수용소행이다. 각자가 알아서 김정일의 방침단위(김정일의 지시에 의해서
무리 배치되는 기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중앙당 간부와의 인맥을 내세워 김정일의 방침단위에서 벗어나려고 손을 썼다. 또 어떤 이는 부모가 환자이기
때문에, 3대독자 외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개인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당위원회에 제의서(탄원서)를 보내는 등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딱한 사정이 있다 할지라도 김정일이 지시한 방침단위이므로 그 어떤 사정도 봐 줄 수 없다는 것이
도당위원회의 대답이었다.
하여튼 수단과 방법을 다해 김정일의 방침단위에서 빠져나가는 자는 인물 중에 인물이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무턱대고 그
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기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자들에게는 엄격한 처벌이 가해졌다. 개별적으로
끌어다 ‘강제노동단련대’에 보냈고, 그래도 강하게 버티면 탄광, 광산에 배치하여 가혹한 육체노동을 시켰다. 당원들이 버티기를
할 때에는 ‘당적 양심’을 운운하며 출당(黜黨)은 물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렸다.
어찌 보면 일제시기 징용이나 징병에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순경들을 피해 다니던 시기와 흡사했다. 오히려 북한의 시대적 환경이
더 가혹했다. 일제시대에는 이동과 거주의 자유가 있어 요리조리 피해 다닐 수도 있었지만 북한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졸업생들은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압박 수단에 못 견뎌 ‘현대 풀판’ 조성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대 풀판 조성에 끌려 들어갔어도 그들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생산을 계획할 가축도 없었고 수의사들이 치료할 환축(患畜,
병든 짐승)도 없었다. 몇 십 마리의 양, 염소를 몰고 다니며 희망 없이 방목공으로 하루하루 살아나가야 했다. 자기 딴에는
훌륭한 수의축산 일꾼이 되어 과학과 기술로 나라 살림에 보탬이 돼보고자 10년 동안 꾸준히 공부했건만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만약 남한에서, 아니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대통령이 특정 학과를 졸업한 대학생들을 특정한
직장에 들어갈 것을 강요한다면 아마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런 일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수 십 년
독재의 세월 속에, 이미 주민들의 머리에서 사라진 개념이다.
염소 ‘기르기’
운동이 아니라 염소 ‘훔치기’ 운동
김정일은 기관, 기업소, 협동농장, 군부대, 학교에 이르기까지 염소, 양, 토끼 등 풀 먹는 집짐승을 기르기 위한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면 일단 그 모든 단위에 어느 정도의 종축(種畜, 종자가 되는 짐승)이 있어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뉴질랜드에서 초기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의 가축을 약탈하는 것이 종축 확보의 수단이었다. 북한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군부대에서는 협동농장, 기업소의 가축을 도둑질하고, 학생들도 협동농장, 기업소의 가축을
도둑질하여 종축을 확보하기 위한 ‘도둑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전국적으로 가축 마리 수는 적고 당조직에서는 단위별 특성을
내세우며 “종축 확보를 빨리 하라”고 주민들을 들볶았다.
우선 군부대에서 종축 확보를 어떤 형식으로 진행하는지 살펴보자.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면서 군부대들은 중대단위까지 ‘염소
기르기 운동’을 벌였다. 중대마다 염소를 기르자니 종자를 구입해야 했다. 방법은 단 하나다. 염소를 가져 올 수 있는
병사에게는 집에 갔다 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북한에서 군 복무 13년 중 부모님 계시는 집으로 휴가를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또 군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부모님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은 젊은 병사들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한다. 따라서 너도나도 염소를 구입해 오겠다고 상부에 제기한다.
휴가의 대가로 부모님의 가정 살림에 폐를 끼친 병사도 있었다. 곧이곧대로,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염소를 그대로 갖다
바친 것이다. 그러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병사도 “내가 구해오겠소” 하고 휴가를 떠났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일까?
물을 것도 없이, 휴가를 끝마치고 돌아오면서 기관, 기업소, 협동농장 또는 주민 사택에서 도둑질해서 중대에 바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정일 장군님의 지시대로 풀 먹는 집짐승 기르기에 앞장서고 있다”고 상급에 보고한다. 지휘관들은 상급으로부터
과대한 칭찬을 받을 것이고, 도둑질한 병사도 칭찬을 받게 된다. 휴가 갔다오고, 칭찬도 받고.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칭찬을 계속 유지하자면 쉽지 않다. 다른 군부대에서 ‘염소 습격(도둑질)’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통경비를 서며 염소를 보호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염소들이 자꾸 폐사(斃死)되어 마리 수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염소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의 지시대로 풀만 먹이려고 노력하니 염소들이 만성적인 영양부족에 시달려 죽어갔다.
상부에 보고한 염소 마리수는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 한참 머리 수를 늘여도 부족할 판에 ‘줄어들었다’고 보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줄어드는 염소의 마리 수를 유지하자면 또다시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낸다. 당연히 병사는 염소를 도둑질해
온다. 이러한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어느덧 염소 기르기는 본래의 목적을 벗어난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 염소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마리 수를 유지하기 위해 아글타글 노력한다. 따라서 염소는 ‘관상용’이다. 나아가 염소가 사람을 잡아먹는 형국이
된다.
노동자 1년치 월급을 염소 한 마리와 바꾸고
사회 기업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염소를 마련하는 과제는 기업소의 후방부서(종업원들의 후생복지를 담당한 부서)에 맡겨졌다.
군부대처럼 도둑질을 할 수도 없고, 이들이 종축을 확보하려면 개인이 사육하는 염소들을 사오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러나
자금이 없다.
어떤 방식으로 자금을 확보할 것인가. 종업원들에게 자금을 모금하는 방법과 기업소의 생산물을 개인에게 팔아 자금을 확보하고
장마당에서 염소를 사들이는 방법을 취한다. 북한의 장마당에서 염소가격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보통 새끼 암컷
700∼800원, 어미 염소 한 마리 당 1200∼1500원 정도 했다(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조치 이전 가격).
이는 노동자 1년 월급을 넘는 액수다.
종업원들에게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기업소에서 모금은 강압적으로 진행한다. “김정일 장군님에 대한 충실성의 표현은
어려운 때 나타난다”고 회유와 압박의 말을 던지면서 말이다. 이 말 앞에 당할 장사 있겠는가. 월급에서 갹출해 염소 사는
데 보탠다.
기업소의 생산물을 팔아서 돈을 만드는 방법은 기업소에서 생산하는 물품의 가치에 따라 각기 다르다.
석탄을 생산하는 탄광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후방부에서는 탄광에서 생산한 석탄을 개인에게 암암리에
팔아 자금을 확보한다. 석탄 가격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북한의 2.5톤짜리 ‘승리 58’호에 한 트럭을
가득 실으면 1000∼1200원이다. 어미 염소 한 마리 가격과 맞먹는다. 이것을 염소 사육을 하는 개인과 맞바꿔치기를
하든가 아니면 돈으로 받아 장마당에서 사온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정일 장군님의 방침을
관철하는 길인데 감히 뭐라 할 수 없다.
이런 형식으로 염소 마리 수를 확보하면 군부대와 같이 보유에만 급급하게 된다. 도둑의 위험도 있고 사육과정에 폐사되는
수가 줄줄이 늘어나는 것이다. 원인은 뭘까?
북한에서 양보다 염소사육을 장려하게 된 것은 염소가 발병률이 적고 생활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기존의
양 사육 장려정책을 염소로 바꿨다. 지난 기간의 염소사육은 대부분 농촌의 가정집에서 개별적으로 사육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면서 개별 사육을 집단사육으로 변화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적인 염소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자연히 무리에서 생활력이 떨어져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또 다른 이유로, 군부대에서와 같이 김정일의 지시대로 알곡사료도
없이 풀사료에만 의존하는 방향으로 사육하다보니 영양이 결핍되어 죽었다. 가정에서 염소를 사육한다면 쌀뜨물을 비롯한 음식찌꺼기를
알곡사료로 대신하여 준다. 그런데 매일 풀만 주니 염소인들 살고 싶겠는가.
◆
에필로그 - 염소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마 전 모 월간지에 함흥청년 염소목장에서 일하다 탈북한 납북어부 김병도 씨의 이야기가 실린 바 있다.
그는 함흥 청년목장의 실태를 이렇게 말했다.
“함흥시에 있는 56개 농장과 기업소·병원들이 각각 한 개의 분장(分場)을 운영하고 있다. 56개 사업소가 1997년부터
상창리의 청년 염소목장에 사서 올려 보낸 염소는 1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농장에서 현재 키우고 있는 염소는
6000마리 정도에 불과하다. 매년 줄어드는 염소들을 보충하기 위해 함흥시의 농장과 기업소·병원들은 매년 봄이 되면 염소를
사서 산으로 올려 보내야 한다.
6,000마리쯤 되는 염소들을 기르기 위해, 1,000여 명이 산골에서 염소를 돌보고, 염소의 겨울 먹이를 확보하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다. 사람보다 더 잘 먹이지만 염소는 계속 죽어 나간다. 지난 6년간 이 목장에서 한 해에 6,000∼7,000마리의
염소 새끼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이 염소목장에서 죽어 나간 염소는 4만 마리 안팎으로 추산된다. 「노는 풀밭에
염소를 키워 고기와 젖을 먹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염소의 대학살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김병도 씨 같은 최말단 목장원이 『염소 목장은 전혀 가망이 없다』고 하는데도, 염소목장이 과연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인지 검토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수령의 명령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월간조선 년 7월호)
위 기사를 읽어보면 오늘 필자가 이야기한 내용과 꼭 들어맞는다. 지금 북한의 실정이 이렇다. 기업소에서는 상급에 보고한
보유 마리 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기업소에서도 염소는 관상용이고 애물단지가 되는 것이다. ‘사람보다 더 잘
먹이면서도’ 자꾸 죽어나가는 염소들을 위해 사람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다. 이렇게 지켜진 염소는 김정일이 현지지도
방문을 했을 때 공개되면서 “군대와 인민이 지금 그 덕을 크게 보고 있다”고 보도된다. 물론 북한 주민들은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중이다. 그 염소를 흐뭇하게 바라 볼 인물은 북한에 김정일밖에 없다.
농촌의 가정집에서 염소를 사육하는 경우 부의 상징이 된다. 가정집에 암염소 3마리만 있으면 부자라고 말 할 정도다. 집단
사육과 달리 가정집의 염소는 비교적 생산성이 높다. 당의 방침과는 상관없이 기르기 때문이다. 3마리가 새끼를 낳으면 3∼4마리는
될 것이고, 새끼를 잘 키워 팔면 3000원 벌이는 된다. 이만한 돈이면 3년 분에 해당하는 노동자 임금이다(7월 1일
경제조치 이전 임금). 또 새끼들이 젖떼기를 하고 나면 2∼3달은 젖을 짜먹을 수 있다.
그렇다고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도 살벌하기 때문이다. 인민군이나 일부 주민들이 자기 염소를 노리는
경우, 염소는 둘째치고 자신도 다칠 수 있다. 그러니 부자이면서도 늘 불안한 마음뿐이다. 게다가 애써 키워온 염소를 언젠가는
당조직에 바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까지 안고 있다. 인민군대는 인민군대대로, 기업소는 기업소대로, 가정집은 가정집대로
이 염소 때문에 잠을 못이룬다.
결국 김정일이 벌여놓은 ‘풀 먹는 집짐승 기르기 운동’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짐승이 필요한 것인가, 짐승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람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아함을 던져준다. 인민들은 그 맛도 볼 수 없는 짐승을 단지 김정일의 지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없이 죽어가도 수없이 사들이면서 기르고 있다. 이러한 정책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면 북한의 민주화는
하루도 미룰 수 없는 선결과제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염소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김정일이 죄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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