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21일 오후 4시 30분 스위스 제네바. 북한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과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Robert Gallucci) 핵 담당대사는 양국 지도자의 승인 하에 ‘기본합의문(Agreed framework)’에 서명했다. 전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외교부 성명을 인용, “김정일 지도자가 조-미 회담 우리측 단장에게 기본합의문에 서명하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으며, 이에 앞선 10월 18일 빌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은 갈루치 대사에게 협상 결과를 보고 받은 뒤 제네바로 가서 합의문에 서명할 것을 지시했다. 근 2년여 동안 긴장과 이완,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돌입하며 지루한 대화를 계속한 끝에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동안 세계의 관심을 끌어온 문제였던 만큼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에서 열린 이날 서명식에는 세계 각 국에서 1백여 명의 보도진이 몰려 취재 경쟁을 벌였다. 북한 대표부 측에서는 기자회견장인 문화관에 황구렁이술, 불로주, 인삼주, 삼곡주, 찹쌀꽈배기 등 각종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기자들을 대접, 이날 서명식은 북한의 ‘승리’를 세상에 알리는 축제의 장처럼 여겨졌다. 기자회견에서 강석주는 클린턴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보낸 서한에 ‘최고지도자’(Supreme Leader), ‘각하’(His Excellency) 등 극존칭을 사용했다면서 “(우리는) 인민의 심정을 담아서 김정일 동지를 최고의 지도자이며 영도자로 지칭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도 이를 인정하고 최고지도자라는 존칭으로 김정일 동지에게 보장서한을 보냈다”고 자랑했다.

그로부터 40일 후인 1994년 12월 1일 오전 9시 미 의회 의사당 ‘덕센 홀’. 상원 외교위 동아시아태평양소위는 갈루치 핵 담당대사와 4명의 핵 전문가들을 증인으로 참석시킨 가운데 북-미 기본합의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이날 현장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상석 특파원은 기사를 통해 “청문회는 갈루치의 ‘원맨 쇼’였다”고 평가했다. 아직 제네바 합의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엉성한 질문을 되풀이하는 의원들 앞에서 갈루치는 교수 출신답게 ‘마치 증인이 아니라 제네바 합의문에 관해 강연하러 나온 사람처럼’ 3시간 동안 쉼 없이 제네바합의의 성과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북한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해 준 것 아니냐는 의원들의 빗발치는 질문에 갈루치는 “5～7년 후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어기게 될 경우라도, 이 기간 동안 북한이 플루토늄의 추가적인 생산이나 축적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합의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답변하였다.
갈루치가 말한 그 ‘5～7년 후’인 2002년 10월 4일 평양. 제네바합의에 북한측 대표로 서명을 했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조지 부시(Jorge Bush)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訪北)한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에게 “농축 우라늄에 의한 핵개발 프로그램을 갖고 있음”을 시인했다. 북한은 “지난 몇 년간 고농축 우라늄을 통해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는 것을 안다”는 켈리 특사의 문제제기에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다음날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찾아와 핵개발 사실을 시인하면서 “우리는 더욱 강력한 무기들도 갖고 있다”고 강한 어조로 대응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플루토늄의 추가적인 생산이나 축적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갈루치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북한은 제네바합의의 망(網)을 교묘하게 빠져나가 ‘고농축 우라늄’으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태는 들불 번지듯 빠르게 전개되어 나갔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11월 14일 뉴욕에서 집행이사회를 열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생산은 제네바합의와 핵확산금지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조치협정, 한반도 비핵지대화 공동선언의 규정을 위반한 것임을 경고하고 제네바합의 이후 지원해오던 중유공급을 2002년 12월부터 중단하겠다고 결정했다.

중유공급이 중단되자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발표를 통해 제네바합의 파기의 책임을 미국에게 돌리면서 12월 12일 핵 동결 해제를 선언했다. 12월 15일 북한 원자력 총국장 리제선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ElBaradei) IAEA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IAEA가 동결된 우리의 모든 핵시설들에 대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최단 시일 내에’ 전부 걷어내도록 해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만일 IAEA가 우리의 요구를 실행하기 위한 조치를 시급히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주일 후인 12월 22일. 북한은 마치 오래 전부터 정해놓은 스케줄이 있었다는 듯 착착 조치를 취해나갔다. 먼저 IAEA 감시 하에 있는 8천여 개의 폐연료봉 저장시설에 대한 봉인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설에 장착되어 있던 감시카메라를 제거해버렸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10년 동안 쉼 없이 돌아가던 녹화테이프는 배터리의 충전이 다한 것도 아닌데 멈춰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문제의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봉인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방사화학실험실은 1991년 5월 영변 핵시설에 대한 IAEA의 제1차 임시사찰에서 이미 ‘플루토늄 재처리시설’로 판명된 곳으로, 원자력 발전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원자폭탄 제조시설에 보다 가까운 시설이었다. 이것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는 것과 같은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어서 12월 27일 북한은 그동안 북한 내에 상주해왔던 IAEA 사찰단원 3명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IAEA는 “북한의 핵사찰단 추방은 위기를 더욱 확산시키는 일”이라고 경고했지만 12월 28일 사찰단 중 1명이 짐을 꾸려 북한을 나오고, 31일 나머지 2명마저 북한을 떠나야 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의 공개적 메시지를 통해 “핵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천명하면서 “북한이 먼저 무조건적으로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북한은 “굴복은 죽음이다, 죽음을 각오한 자 당할 자 없다”는 강경한 성명으로 맞섰다. 비록 언쟁일 뿐이지만 지금도 이러한 대치의 기운은 가시지 않고 있다. 앞으로 두 나라는 얼마동안 일정한 냉각기간을 거치게 될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과 북한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 역사의 시계는 다시 10년 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속도전(速度戰) 식으로 추진한 핵 개발

1990년대의 ‘전(前) 핵 위기’와 현재의 핵 위기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1992년에서 1994년 사이 발생했던 핵 위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때와 지금은 국제 정세, 남한과 미국 정부의 성향, 북한의 정치,경제적 사정 등 지형(地形)이 많이 바뀌었지만,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 조성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94년의 제네바합의를 ‘북한의 민주화를 한 10년은 늦춰버린 민주주의 세력의 패배’라고 생각한다든지, ‘국제적 합의와 질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불량국가에게 당근을 던져준 외교적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실패한 경험을 면밀히 분석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1990년대로 가기에 앞서 우리는 좀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북한의 핵개발 역사를 간략하게 훑어보기로 하자.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이미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핵무기를 단순한 협박용이 아니라 ‘실전 사용 가능성’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자 북한은 중대한 위협을 느낀다. 1950년 12월 12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에서 김일성은 “미국 강도들은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자기들의 침략군이 파멸에 직면하게 되자 원자탄을 사용한다는 흉악한 위협을 들고 나오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실제 1953년 5월 미 합동참모부는 막바지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자 “필요하다면 핵무기 사용 결정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계획을 수정할 것”을 클라크 장군에게 지시한다. 이러한 핵무기 사용 검토는 휴전협정을 조기에 마무리짓는 데 중요한 역할로 작용하였다.

전후 북한은 미국이 대량보복전략(massive retaliation)을 채택하고, 50년대 중반 중소분쟁으로 인해 어느 나라로부터도 확실한 안보보장을 담보 받지 못하게 되자 핵기술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1955년 원자 및 핵물리학 연구소를 북한 과학원에 설치하고, 1956년 9월 7일 소련과 ‘원자력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매년 30여 명의 북한 기술자를 소련에 연수차 파견하였다. 이어 1960년대까지 북한은 소련과 중국 사이를 오가며 핵 관련 기술을 습득하였다. 이 기간동안 3,000여 명의 북한 과학기술자들이 외국에서 핵 관련 교육을 받고 돌아온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은 1962년 평안북도 영변과 박천에 원자력 연구단지를 조성하면서 본격적인 핵개발 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1965년에는 소련에서 도입한 2MW급 연구용 원자로(IRT-2000)를 영변에 설치하여 가동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부속된 0.1MW급의 임계시설은 향후 20년 간 북한 핵 프로그램의 산파역할을 담당한다. 1971년 4월 북한은 중국 핵 과학자 8명을 초청하여 원자로 건설에 대한 지원을 받았고, 1972년에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국인 핵 전문가 김경하 박사를 입북시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이어 1973년 김일성대학에 핵물리학과를 신설하고, 같은 해 김책공업대학에 핵전기공학과, 핵연료공학과 및 원자로공학과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핵 후계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원자력법을 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핵개발을 시작한 북한은, 1974년 9월 IAEA에 가입하면서 국제규제 하에 합법적으로 평화적인 핵 관련 설비를 구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8년에는 북한 지역 내 우라늄 매장량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총 매장량 2,600만 톤 가운데 약 400만 톤의 가채량을 확인하였다. IAEA 가입과 함께 북한은 핵사찰을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부분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하였는데, 1977년 7월 영변에 있는 원자로와 임계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의 핵개발은 ‘핵무기 개발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그 규모가 작고 성과가 초기단계이며, 특히 소련이 건재하여 사회주의 국가들의 핵확산을 통제하고 있던 터라 큰 위협요소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씨앗은 1980년 북한이 5MW급 원자로를 영변 핵 단지에 자체기술로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자라났다. 1984년 미국의 첩보위성 KH-11은 영변에 건설중인 이 두 번째 원자로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선 이 5MW급 원자로가 연구용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컸으며, 원자력 발전용으로 보기에는 전력공급에 필수요소인 송전(送電)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점이 수상했다. 더구나 1985년부터 원자로 옆에 다른 하나의 거대한 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한 재처리시설이라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다(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이라 명명한 길이 200m, 폭 80m의 이 대형 6층 건물은 1992년 IAEA의 사찰결과 재처리시설임이 판명되었다).

핵시설은 ‘속도전(速度戰) 식으로’ 갑작스레 늘어나기 시작해, 1984년에는 50MW급과 200MW급 원자로가 추가로 건설되기 시작, 첩보위성에 포착되었다. 계산에 따르면 5MW급 원자로를 가동하면 연간 7kg 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데, 이 정도면 핵폭탄 하나 정도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다. 여기에 50MW급과 200MW급 원자로까지 완공되면 연간 20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여 매년 30개 이상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게 된다. 그대로 두면 북한이 완전한 핵폭탄 양산(量産) 국가로 들어서게 될 상황이었다. 미국이 이러한 시설들을 발전용으로 보지 않았던 것은 여전히 송전시설이 갖춰지지 않고 원자로의 형태도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흑연감속로’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러한 정보를 소련에 건네주면서 신속한 조치를 요구하였다. 방법은 북한을 NPT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은 IAEA에는 가입되어 있었지만 NPT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핵개발 의혹과 관련된 사찰을 강제할 수 없었다. 소련은 NPT에 가입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북한은 “영변의 핵시설은 발전용”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에 반대급부를 요구했다. 의심스럽다면 플루토늄 추출 우려가 적은 ‘경수로 원자로’를 건설해달라는 것이다. 결국 소련은 1985년 12월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 강성산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440MW급(VVER-440형) 원자력 발전소 4기를 지어줄 것을 약속하고 NPT에 서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이 NPT에 가입한 후에도 IAEA와 핵 안정협정(safeguards agreement) 체결을 미루고 급기야 마감 시한인 1988년 12월을 넘기자, 소련은 IAEA의 사찰을 수락하여야 경수로를 제공해주겠다며 1985년 북한과 맺었던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경제 기술 협력 협정’을 백지화하였다. 중국은 1987년 북한의 핵개발이 핵무기 제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혹을 보이자 원자력 기술이전 활동을 중단하고 자국의 원자력 기술자를 송환하였으며, 핵 재처리시설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6년 동안이나 시간을 끈 핵 안전협정 서명

여기서부터 북한 핵문제는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하면서 서두에서 말한 ‘10년 전 상황’의 씨앗이 뿌려진다. 북한의 협상전술도 이제부터 하나 둘씩 등장한다. 지금까지는 북한이 핵개발을 위한 탐색전을 벌여왔다고 볼 수 있으며 국제 사회도 의혹을 가지면서도 이것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앞서 소개했듯 북한의 핵개발이 단순한 연구 단계를 벗어나고 나아가 핵무기 개발용이라는 의혹이 짙어지면서 북한 핵문제는 본격적인 2라운드에 접어든다.

2라운드 관전에 앞서 우리는 ‘핵 안정협정’에 대해 간단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북한은 1985년 12월 12일 NPT에 서명하였다. IAEA와 NPT의 멤버가 되면 군사적 목적의 핵개발이 차단되는 대신 평화적 목적의 핵개발을 적극 보장받게 된다. 즉 원자력이 평화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검증 받는 조건 안에서 장비, 물자 및 과학 기술정보 등을 최대한 제공받을 권리가 생긴다. 이를 위해 서명국들은 IAEA와 안전협정을 맺고 그간의 핵시설에 대한 국제사찰을 받게 된다.

‘사찰을 받는다’는 것은 그동안의 핵이 평화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을 검증 받는 동시에, 갖고 있는 핵시설이 기술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인정받아 자국 국민과 주변국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한다. IAEA는 사찰결과에 따라 기술적인 문제점이 있으면 그 보완책을 제시해주고, 의혹이 있으면 그것을 말끔히 털어내기 위한 추가적인 사찰을 진행한다. 또한 IAEA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것이 국익의 손상만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 멤버들을 위한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1992년 북한에는 기술지원을 위해 30만 달러를 책정해 놓은 바 있다. 물론 주변국이나 자국민의 불안 따위야 안중에도 없다는 ‘막가파식 국가’라든지,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지키지 누가 간섭하느냐고 따지는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국가라면 성실히 사찰을 받고 핵의 평화적 이용과 관련하여 자신이 부족한 부분에 대한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요구한다.

이러한 안전협정은 NPT 가입 후 18개월 이내에 체결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NPT에 가입한 지 만6년 만에 안전협정에 서명하여 IAEA의 사찰을 수락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북한은 18개월을 6년으로 늘일 수 있었나.

여기에는 운 좋게도(?) IAEA의 행정적인 실수가 먼저 있었다. 협정 초안 양식을 잘못 보낸 것이다. 북한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IAEA의 실수를 시정해주지 않고 18개월의 시간을 그냥 보냈다. 그리고 협정안의 응답시한인 1987년 6월이 되어서야 서류가 잘못 보내졌다는 것을 알게 된 IAEA는 특별한 조치 없이 곧바로 올바른 협정안을 보냈다. 또다시 18개월을 벌게 해준 것이다. 따라서 협정안의 응답시한은 이제 1989년 12월이 되었다. 하지만 응답시한을 마감하였어도 북한에서 날아오는 문서는 없었다.

북한이 순순히 안전협정에 서명할 뜻이 없음을 알게 된 미국은 소련, 중국을 통해 북한에 압력을 가했고, 북한을 A급 감시지역으로 설정하면서 군사정찰위성의 정찰활동을 통상의 몇 배 수준으로 증강시켰다. 이때 프랑스의 상업용 인공위성 SPOT는 북한의 핵시설이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 북한의 안전협정 서명 지연은 점차 국제 사회의 주요한 이슈로 떠오른다. IAEA는 89년 12월 정기이사회에서 북한의 NPT 의무 이행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때 북한은 상투적인 수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안전협정 체결 마감시한을 넘긴 1990년 2월, 북한은 갑자기 안전협정체결의 두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협정서에 ‘핵국(核國)으로서 NPT에 가입한 국가는 비핵국(非核國)으로서 NPT에 가입한 국가에게 위협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에서 핵무기가 제거되지 않거나 북한이 핵 안정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북한에 대한 핵 위협이 있을 경우 이 협정의 효력을 유보시키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NPT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NPT 탈퇴’가 차후 자신들의 협상카드로 활용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북한의 주장은 NPT 체제 내에서 자신을 일종의 ‘예외’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자간 협약에서 특정 국가만을 위한 예외를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전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게 된 IAEA는 1989년 12월부터 1990년 7월 사이 북한과 3차례에 걸쳐 교섭을 벌였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사실 북한의 속셈은 ‘우리를 핵으로 위협하는 국가’가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 그 때문에 안전협정 체결을 미루고 있다고 책임을 덮어씌우는데 있었다. 물론 핵개발을 계속 추진하기 위한 시간을 벌 수도 있다. 역시 북한은 의도된 드라이브에 따라 1991년 연형묵 총리의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남한 내 미군 핵이 완전히 철수하면 핵 안정협정에 서명할 것”을 밝혔다. 물러날 수 없는 지점에 몰리게 되면 또 다른 문제를 전제조건으로 들고 나오면서 어물쩍 본질을 흐리는 고루한 수법이다.

그런데 북한의 예상 밖으로 미국은 남한 내 핵무기를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세계적인 핵 감축 흐름이 있는 마당에 북한의 핵 안정협정 서명을 받아내는 대신 남한에 있는 전술 핵무기들을 철수하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1991년 9월 27일 미-소간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이 타결됨에 따라 미국은 주한미군이 갖고 있던 전술 핵무기들을 전부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나아가 미국은 “미군이 핵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남북한 상호 핵사찰을 실시하자”며 ‘상호 사찰’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팀스피리트 훈련으로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으로서는 ‘미군 핵과 그 위협의 제거’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던 명분이 일정 부분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1991년 12월 3일 ‘남북기본합의서’(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대한 합의서)가 채택되고, 1992년 1월 20일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이루어졌으며, 1992년 1월 22일 뉴욕에서는 북-미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었다. 이어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핵 안정협정에 서명을 하고 IAEA 사찰 수용을 약속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1992년 4월 9일 핵 안정협정을 비준함으로써 북한의 NPT 가입은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6년 동안의 절묘한 ‘빠져나가기’가 종식되는 듯 했다.

한편 걸프전쟁이 끝난 1991년 5월, 세계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전쟁 과정에서 드러난 이라크의 핵시설을 사찰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이라크가 보고하지 않았고 국제 사회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핵시설을 찾아낸 된 것이다. 일반사찰을 계속 받아 온 나라에 감지 못한 핵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은 IAEA의 능력을 의심케 했으며, 핵 의혹국가에 대한 사찰활동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따라서 1991년 12월 IAEA는 특별사찰제도 개선안을 마련하여, 핵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관련당사국이 IAEA의 특별사찰을 거부할 경우 UN 안보리에 보고할 수 있고, 특별사찰에서도 모호한 부분이 있을 경우 역시 UN 총회나 안보리에 보고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방사선 샘플을 채취하고 분석하는 새로운 기술도 소개되었다. 그 첫 적용대상은 자연히 북한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중대한 불일치 - g대 kg의 논쟁

시간을 좀 건너 뛰어가 보자.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은 애초의 약속대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1993년 1월 26일 한국과 미국은 93 팀스피리트 훈련이 3월 9일부터 18일까지 야외기동훈련의 형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93 팀스피리트 훈련이 있기 하루 전인 1993년 3월 8일, 북한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명령을 통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다. 김정일은 전국에 걸쳐 모든 인민과 군대에 대해 전쟁 준비 태세를 명령했다. 93팀스피리트 훈련은 예정대로 실시, 총 병력 12만 명으로 예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그러자 북한은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은 이날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제9기 7차 회의를 열고 NPT 탈퇴 문제를 의제로 상정, 성명을 채택하여 발표하였다. 중앙방송을 통해 보도된 성명에서 북한은 “조선 정부는 나라의 최고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부득이 핵무기전파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에서의 탈퇴는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핵전쟁책동과 국제원자력기구 서기국 안에 일부 계층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응당한 자위적 조치이다. 우리의 이러한 원칙적 입장은 미국이 우리에 대한 핵 위협을 중지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서기국이 독자성과 공정성의 원칙으로 돌아설 때까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에는 일대 전운이 감돌았다. 북한은 준전시태세 아래 등화관제 훈련을 실시하고 병력을 소집하였으며, 남한에도 ‘3월 말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고 비상식량을 사재기하려는 행렬이 극성을 부려 국무총리가 직접 나서 자제를 당부할 정도였다. 평양에서는 NPT 탈퇴를 지지하는 군중대회가 열렸고, 남한 대도시들에서는 “북한의 NPT 탈퇴는 팀스피리트 훈련 때문”이라며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를 주장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열리는가 하면, 북한의 NPT 탈퇴와 핵무장 야욕을 규탄하는 우익단체들의 시위도 이어졌다.

물론 NPT는 조약의 효력 기한과 탈퇴를 명시한 제10조에서 “조약체결국은 이 조약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관한 비정상적인 사태가 자국의 최고이익에 위해가 된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그 주권을 행사하여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권한을 갖는다”고 밝히고 있다. 탈퇴의 효력은 3개월 후에 발생한다. 그러나 NPT가 세계 무대에 등장한 지 20여 년이 되도록 가입국이 이를 탈퇴한 예는 없었다. 이 전무(全無)한 사건에 대해 세계 언론의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북한은 1992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핵 안정협정을 비준한 이후, 5월 4일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5월 23일부터 IAEA의 1차 임시사찰을 받기 시작했다. 원래 안전협정에 따르면 서명에 비준한 후 보조약정을 90일 이내에 체결하고, 보조약정 체결 후 30일 이내에 피사찰국이 수락의사를 밝혀야 사찰이 시작된다. 따라서 북한은 약 4개월도 정도 사찰을 지연시킬 수 있었음에도 웬일인지 성실하고도 신속하게 사찰을 수락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북한은 NPT 탈퇴라는 초강수(超强手)를 두었고, 팀스피리트 훈련과 준전시상태가 난마처럼 뒤엉켰다. 도대체 그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NPT 탈퇴 조건에 나와 있는 “조약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관한 비정상적인 사태가 자국의 최고이익에 위해가 된다고 인정”될 만큼 중대한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그럼 이제 다시 북한이 핵 안정협정을 비준하고 처음으로 국제사찰을 받는 1992년 5월로 돌아가 보자.

북한은 IAEA에 제출한 최초 보고서에서 모두 14개의 시설을 신고하였다. 그리고 1989년 원자로 가동을 70일간 중단시켜 플루토늄 80g을 한 차례 추출하였다는 내용도 신고하였다. 보고된 시설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방사화학실험실’이었다. 이곳은 그동안 재처리시설로 의심을 받아 오던 곳이었다. 실제 실험실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다.

1992년 5월 11일～16일, IAEA 한스 블릭스(Hans Blix) 사무총장이 2명의 핵 전문가를 대동하여 먼저 북한을 방문했다. 방문을 마치고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은 블릭스는 “북한이 재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5월 23일～6월 5일, IAEA의 제1차 임시사찰이 진행되었다. 첫 사찰에서는 북한이 제출한 최초보고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핵시설에서 시험용 샘플을 채취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6월 10일 북한은 최초보고서에 명시된 방사화학실험실이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이라는 것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량의 플루토늄을 연구 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어찌되었든 북한이 재처리시설을 갖고 있고, 플루토늄을 추출해왔음이 분명해졌다. 문제는 ‘그 양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이 NPT를 탈퇴하기 전까지 북한 핵문제의 주요 쟁점이 ‘과거에 북한이 얼마만큼의 플루토늄을 추출하였는가’하는데 중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임시사찰과 1992년 7월 7일～17일까지의 제2차 임시사찰을 마친 결과 IAEA의 전문가들은 채취한 샘플을 분석,추산한 플루토늄의 추출량과 북한이 최초 보고서에 신고한 추출량 사이에 ‘중대한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했다. 또한 북한이 과거에 추출하였다고 제시한 플루토늄이 현재 5MW급 원자로 내의 연료봉에서 추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IAEA는 “북한이 최소한 3차례(89년, 90년, 91년)에 걸쳐 kg 단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북한이 제시한 g과 IAEA가 측정한 kg 사이의 지루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g과 kg의 싸움은 북한의 NPT 탈퇴가 있기 직전인 제6차 임시시찰(1993년 1월 26일～2월 6일)까지 계속 되었고, 해를 넘겨 1994년 3월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 미국 국방장관이 북한의 전쟁불사 발언에 맞서 “미국은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대북 사찰을 강제할 것”이라고 응수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지루한 공방전은 1994년 5월말 북한이 8,000여 개의 폐연료봉을 5MW급 원자로에서 인출하여 새로운 연료봉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과거 핵개발 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사라져 버려 ‘g대 kg의 논쟁’이 무의미해져 버린 것이다. 1994년 6월 8일 IAEA 대변인은 “북한이 5MW급 원자로에서 모든 폐연료봉 교체 작업을 완료했으며, 이제 과거 핵 규명을 위한 사찰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5MW급 원자로에서 인출된 8,000개의 폐연료봉에서 추출할 수 있는 플루토늄의 양으로 4～5개의 핵무기 제조가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예상했다. 이제 북한의 자발성에 근거한 핵 검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IAEA는 1994년 6월 10일 이사회를 열어 56만 달러에 상당하는 재정지원 중단과 1970년대부터 제공되어 온 기술지원 중단을 결의했다. 페리 국방장관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공중폭격을 실시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였고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한국에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은 6백 60만 명에 달하는 예비군 소집 명령을 내리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됐다. 이에 대해 북한은 NPT 탈퇴에 이어 이번에는 “IAEA에서 탈퇴한다”는 외교부 성명을 6월 13일에 발표하였고, 미국은 6월 15일 UN 안보리에 대북 경제 제재에 대한 결의안을 상정했다.

주지하다시피 이때의 위기는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2라운드를 마무리하면서 분명히 달라진 점은, 북한의 과거 핵 활동에 대한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IAEA 탈퇴까지 선언되면서 더 이상 북한을 규제할 수 있는 틀이 없어지자 북한 핵 문제에 미국이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IAEA가 샅바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핵 씨름이 하루아침에 허무해지고, 결국에는 ‘미국’이라는 배후의 선수로 교체되어 샅바를 잡는 3라운드가 시작된 것이다.

새롭게 전면에 나선 선수 - 미국 행정부는 ‘과거에 북한이 얼마만큼의 플루토늄을 추출하였느냐’는 게임 2라운드의 논점에서 벗어나 ‘그동안의 핵개발에 대한 검증은 포기(혹은 묵인)하더라도 앞으로의 핵개발은 저지하겠다’ 하는 데로 관심의 초점을 돌리고 이에 맞춰 협상전략을 다시 짜게 된다. 또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씨름판을 뛰쳐나간 선수(북한)를 어떻게 하면 다시 씨름판에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불리하면 판을 뒤집고 상대가 내 페이스(pace)에 따라 올 때까지 그물을 쳐놓고 기다리는’ 북한의 협상전술에 그대로 말려든 꼴이 되었다.

특별사찰은 죽어도 받을 수 없다?

시간을 앞뒤로 왔다갔다하니 약간 어지러울 수 있겠지만 중심을 똑바로 잡고 이제 우리가 타고 있는 타임머신의 계기판을 다시 1992년 5월, 북한이 첫 번째 임시사찰을 받던 때에 맞춰보자.
제1차 임시사찰을 마치고 IAEA는 이사회를 열어 사찰결과를 논의한 후 북한이 과거에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을 의심하면서 △재처리시설의 폐쇄 △미신고된 2개의 핵 관련 시설에 대한 사찰 허가 △남북 상호 핵사찰을 촉구하였다.

여기서 새로이 ‘미신고된 2개의 핵 관련 시설’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시설은 이미 1990년에 포착된 바 있는 시설이지만 북한의 최초 보고서에는 빠져 있었다. 영변 핵 단지 내에 있는 시설로, 전문가들은 이 가운데 하나는 소형 핵 재처리시설 또는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소로, 다른 하나는 액체 및 고체 핵폐기물 저장소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북한은 1992년 8월 29∼9월 13일 진행된 제3차 임시사찰 때에 미신고 시설 2곳에 대한 사찰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모든 시설에 대한 완전한 사찰을 허락하지 않고 일상용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보이는 시설에 대해서만 방문을 허용했으며, 군의 통제 하에 있는 다른 하나의 건물은 밖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하는 것만 허용하였다. 따라서 이 시설이 핵 활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얼마 후 미국 정찰위성은 사찰단이 도착하기 며칠 전 노동자들이 이곳을 흙으로 덮고 위장하는 모습을 포착하여 공개함으로써 핵시설이라는 의혹을 짙게 했다.

한편 북한은 IAEA가 촉구한 남북 상호 핵사찰을 계속 거부하였다. “(미국이 전술핵무기를 철수하였다할지라도) 한-미 군사동맹이 있고 핵우산이 존재하는 한 핵무기 철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북한이 이렇게 상호 핵사찰을 거부하자 한국과 미국은 압박책의 일환으로 1992년 9월, 팀스피리트 훈련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포커스-렌즈 훈련을 실시하였다. 또 10월 7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24차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북한 핵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2단계 주한미군 추가 감축을 유보하고 △남북상호핵사찰을 비롯한 남북관계가 진전되지 않을 경우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할 수 있음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전술핵을 철수했다는 것은 간교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긴장 속에 1992년 11월 2일∼14일 제4차 임시사찰이 진행됐다. 그러나 진전은 없었다. IAEA는 정확한 샘플 분석을 위해 지하층으로부터의 샘플 채취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계속 거부하였고, 미신고시설에 대한 재방문도 허용하지 않았다. IAEA는 “북한이 과거에 보다 많은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최초 보고서를 수정하라”고 요구하였고, 한국과 미국은 ‘남북 상호 핵사찰’과 이를 거부할 시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한다’는 두 장의 카드로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5차 임시사찰(1992년 12월 14일∼19일) 도중인 12월 18일 중국과 러시아는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한국과 미국이 주장하는 남북 상호 핵사찰을 지지하는 입장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은 점점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북한이 미신고시설 2곳을 은폐하는 모습이 담긴 인공위성 사진이 공개되면서 12월 22일 IAEA는 이들 시설에 대한 재사찰을 다시 한번 요구하였다. 물론 북한의 대답은 ‘거부’였다. 1월 10일 북한은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핵과 무관한 군사시설 사찰은 북한의 최고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1월 12일 IAEA는 특별사찰(Special Inspection)의 형식으로 미신고시설에 대한 사찰을 강행하겠다는 제안서를 북한에 발송하였고, 북한은 1월 14일 “특별사찰은 법적 근거가 없으므로 수용할 수 없다” 내용의 답변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오판이었다. 1991년 이후 IAEA는 권한을 강화하면서 피사찰국의 시설이 어떠한 용도라고 하여도 핵시설로 의심을 받으면 무제한의 특별사찰을 실시하도록 규정하였다. 블릭스 사무총장은 “우리가 핵 관련 시설로 믿는 이상, 군사시설이라는 이유로 방문이나 사찰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여기서 잠깐 1992년의 임시사찰 상황을 되돌아보자면, IAEA는 이라크 핵문제로 인해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면서 ‘IAEA의 주도에 의한 핵의혹국가 문제 해결’의 선례를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북한은 이러한 IAEA의 변화와 강한 의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안전협정체결 즉시 사찰을 수용하는 실수(?)를 범했으며, 과거 핵 활동이 드러날게 뻔한 샘플을 채취하도록 하고 문제가 발생하자 사찰을 거부하는 등 투박한 대응으로 일관한다. 대강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던 IAEA의 사찰이 집요하게 계속되고 특별사찰까지 거론이 되자, 아마도 이 시점에서 북한은 ‘판을 엎고 뛰쳐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1993년 1월 31일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빌미로 제6차 임시사찰(1993년 1월 26일∼2월 6일)을 방해하기에 이른다.

1993년 2월 8일 IAEA는 6차에 걸친 그동안의 사찰결과를 발표하면서 앞서 소개한 여러 가지 의혹들을 발표하고, 2월 9일 정식으로 북한에게 특별사찰을 요구한다. 원칙에 따른 정면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해서 특별사찰을 거부하자 IAEA는 2월 25일 이사회를 열고 강화된 규정에 따라 “북한이 협조적이지 않을 경우 대북 특별사찰 문제를 UN 안보리에 회부할 것”을 밝히게 된다.

북한의 속셈으로서는 ‘이제 갈 길은 하나’였다. 그동안 IAEA를 얕잡아 보고 시간을 끌었는데 특별사찰까지 결의하게 되니 그냥 막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2월 26일 노동신문은 사설을 통해 “(특별사찰은) 북한의 국가적 존엄성을 해치고 고립시키기 위한 음모이자 용인될 수 없는 주권침해행위”라면서 “이로 인해 제재가 가해진다면, 그리고 우리의 성스런 영토가 강대국에 의해 유린당한다면, 이는 남북한 모두를 전쟁의 암운 속으로 몰아넣는 매우 위험한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3월 9일 미국과 한국이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하려하자 3월 8일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3월 12일 NPT를 탈퇴하는 ‘어차피 갈 수밖에 없었던 길’로 북한은 달려가게 된다.

북미고위급회담: 큰 패배로 가기 위한 작은 패배의 시작

남한 내 일부 친북(정확히 표현하자면 ‘김정일 친위’)세력은 북한의 NPT 탈퇴를 두고 “적의 급소를 불시에 타격한 일대 쾌거”라고 기뻐하면서 ‘북한의 정치적 승리’임을 자축하였다. 최근 북한이 또다시 NPT를 탈퇴하는 쇼를 벌이자 남한의 한 친북 목사는 “내 생각에는 북이 NPT를 탈퇴한 것은 통쾌하기까지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공개적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그러나 이때 과연 북한 정권은 기쁘고 통쾌했으며 여유있고 느긋했을까. 또 반대로 미국은 예상치 못한 일격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을까.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였을 것이다. ‘NPT 탈퇴’라는, 가지고 있는 유일한 카드를 꺼내들은 북한은 이제 더 이상 내놓을 패가 없다는 사실에 막막했을 것이다. 물론 ‘IAEA 탈퇴’라는 또 다른 카드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종의 ‘죽은 패’에 불과하다.

1993년 5월 11일 UN 안보리는 IAEA의 보고를 받아들어 대북 결의안(결의 제825호)을 채택한다. 북한에 대해 NPT 복귀 및 핵 안정협정의 준수를 요구하고 필요하다면 안보리가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북한은 겉으로는 안보리의 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면서 제2의 한국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지만, 만약에 미국이 직접적인 군사행동에 나서게 되면 이것은 그들(김일성 부자)이 바라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될 판이었다. 설령 그들이 애초에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서 혹은 미국의 위협에 대항해서 핵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것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스스로 무덤을 판 일’로 귀결되는 것이다.

결국 북한은 운신의 폭이 극도로 좁은 상태에서 북-미 고위급회담 개최를 제안하게 된다. 그것도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지 △북한의 한국 내 미국 군사시설에 대한 사찰 △미국의 대북 핵공격위협 중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거 △북한 사회주의 체제인정 등의 5대 전제조건을 배짱 좋게 내걸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조건도 당시 상황에서는 그리 공세적인 전제조건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북한은 고비 때마다 운이 좋았다. 미국의 ‘실수’가 시작된 것이다. 북한 핵문제가 시작된 초기부터 미국은 여기에 가장 이해관계가 많은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IAEA를 전면에 내세웠지 자신이 직접 상대자로 나서지는 않았다. 이것은 1970년 NPT가 발효된 뒤부터 변화한 미국의 핵 비확산정책으로, 잘 해결된다고 해도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핵 포기의 대가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줘야 하는 일방적인(unilateral) 핵 정책을 탈피해, IAEA를 통해 주요 국가들 간의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다자적(multilateral) 핵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북한 핵문제 대응 초기에는 이러한 원칙이 그런대로 잘 지켜졌다.

1993년 5월의 상황은 북한이 더 이상 꺼내 놓을 카드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핵개발을 추진할 수도 없고, UN 안보리가 제재 결의를 하는 등 NPT 탈퇴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도 좋지 않아 실질적 행동이 임박해 온다면 두 손 들고 백기투항 하던지 한 방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북한 내부의 사정도 1990년대 중반 식량난의 바로 전 단계로서 손가락만대도 쓰러질만한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동안 IAEA를 잘 내세우다가 갑작스레 자기가 앞장서 북한의 대화제의에 응해주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미국이 이렇게 나온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있다. 우선 미국은 1995년으로 예정된 NPT 조약 연장 문제를 놓고 전전긍긍했다. 1970년 발효된 NPT는 그 유효기간이 25년이다. 애초에 NPT는 강대국들의 핵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비보유국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반핵에 대한 국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그나마 유지가 가능했다. 이것을 1995년이면 다시 갱신하도록 되어있는데, 분명한 핵개발 의혹을 갖고 있는 북한이 NPT 체계를 뒤흔들어놓고 나가버린 것이다. 북한의 이런 행동이 다른 비핵국가들의 동반 탈퇴를 충동질한다든지, NPT도 별 효용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미 행정부는 어떻게든 북한을 NPT 체제로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탈퇴를 선언하였다 해도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3개월이 걸리니 6월 12일까지는 어떻게든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앞으로 진행될 협상결과에 나타나지만 미국은 북한이 NPT에 머무르는 조건으로 양보와 양보를 거듭하며 많은 요구사항을 들어준다. ‘잘못된 행동은 보상받지 못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고 ‘잘못된 행동을 할수록 보상받는다’는 이 엉뚱한 사례는, 물론 미국은 NPT를 지키고싶어 그랬겠지만 오히려 NPT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었다. 북한을 NPT로 다시 끌어오는 것이 NPT 갱신의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약속을 깨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는 것이 NPT를 유지하는 확실한 방법 아닌가(1995년 NPT는 175개국의 합의에 의해 무기한 연장하는 것으로 갱신되었다).

게다가 1993년 5월 26일 로버트 갈루치 차관보는 미 의회 연설을 통해 △북한과의 고위급 회담 개최 가능성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지 △주한미군 기지에 대한 북한의 핵사찰 허용 △북한에 대한 핵사용 위협의 금지 △북한과 미국, 일본, 한국과의 교역 확대 등을 약속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1995년 NPT 갱신기 등을 다 계산에 넣고 탈퇴를 강행했다 해도, 갈루치의 연설은 서로 처해있는 상황이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미국의 실수에는 ‘정권교체’도 한 몫 하였다. 당시 미국은 빌 클린턴 행정부가 새로이 출범해 있었다. 8년 만에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부는 집권초기 강경과 온건을 오락가락하는 등 정책에 일관성이 없었고, 특히 아시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했다. NSC (국가안보회의) 내에 아시아 문제를 담당하는 직원은 2명이었고 국무부의 정책계획 직원은 오직 한 명이었다. 이렇게 전문인력은 없는 반면 북한 핵문제에 관련된 부서는 너무도 많아 1993년 1월 하순이 되자 북한 및 핵문제 관련 외교 전문과 뉴스브리핑을 심사하는 부서만 20개가 넘었다. 그러나 코리아 데스크를 담당하고 있는 인원은 고작 7명으로, 북한 문제 담당자는 비서를 포함해서 고작 4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작은 나라가 해체된 소비에트 연방을 대신하여 안보의 위협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상당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큰 문제를 갖고 북한과 협상을 하는 것은 휴전협정 이후 처음이어서, 북한의 협상 전술에 대한 사전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새로운 행정부는 가시적인 성과를 원했다. 그 첫 시험대가 NPT에서 탈퇴한 북한을 어떻게 제자리로 옮겨놓느냐 하는 과제였다. 상황은 뒤바뀌어 6월 12일까지 어떻게든 합의를 보아야 하는 미국과 예상찮은 호재를 만난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됐다. 제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은 이렇게 시작하였고, NPT 탈퇴가 효력을 발휘하기 하루 전인 1993년 6월 11일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와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은 정전 이후 북-미간 최초의 외교문서인 북-미 공동성명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내용은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이러한 무력으로 위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한다 △조선반도의 비핵화,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며 상대방의 자주권을 호상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조선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 북-미 대화를 계속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핵무기전파방지조약으로부터의 탈퇴효력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만큼 일방적으로 임시 정지시키기로 한다고 되어있다.

미국에게 있어 이 합의는 ‘큰 패배로 가기 위한 작은 패배의 시작’일 뿐이었다. 합의를 통해 북한은 NPT 탈퇴를 보류한다(‘철회’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양보만을 했을 뿐 그동안 주장해 왔던 거의 모든 것을 보장받고 임박했던 안보리의 제재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한 “탈퇴효력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만큼 일방적으로 임시 정지시키기로 한다”는 표현은 북한이 맘만 먹으면(필요하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뛰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차후 북한이 “NPT 체제 내에서 ‘특수 지위’에 있다”고 주장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해주게 된다.

더구나 북-미 고위급회담 개최를 비웃기라도 하듯 5월 29일 북한은 동해 상공에 사정거리 1,000km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노동1호’를 시험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앞으로 북한이 핵만 손에 넣으면 탄두와 미사일을 결합하여 일본쯤은 사정거리 안에 둔다는 의미의 대사변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마이니찌 신문은 “미국이 북한의 NPT 탈퇴보류에 대해 대가를 부여한 것은 풋내기 외교의 결과”라고 혹평했다.

영원히 묻혀버린 '과거 핵활동 검증'

그래도 타협은 계속 되었다. 북-미간의 2단계 고위급회담은 1993년 7월 14일∼19일 제네바주재 북한대표부에서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회의 첫날 북한은 △미국의 핵무기 불사용을 문서로 보장할 것 △팀스피리트 훈련을 영구적으로 중단할 것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것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할 것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지지할 것 등을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1단계 회담의 전제조건이었던 미국의 대북 핵공격 위협 중지를 ‘문서화할 것’으로 더욱 구체화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에 대해서도 ‘영구적 중지’로 수위를 높였으며, 1차 회담에서 합의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도 ‘고려연방제 통일안 지지’로 끌어 올렸다. 거기다가 평화협정 체결, 테러지원국 해제까지 추가했다. 하나를 들어주면 둘을 요구하고, 둘을 인정하면 열 개를 들고 나오는 북한식 협상 전술이 본격화된 것이다.

둘째 날 북한은 ‘관대한 제안’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 북한의 원자로를 경수로로 전환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셋째 날 회의에서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2단계 회담을 마치면서 미국은 3단계 회담의 조건으로 △IAEA 및 한국과 진지한 토의를 하여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할 것 △NPT를 탈퇴하지 말 것 △추가적인 플루토늄 추출을 감시하기 위한 안전조치의 지속성을 유지할 것 등 다시 한번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반복하였다.

2단계 고위급 회담에 따라 1993년 8월 4일 IAEA 사찰단 3명이 방북하여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실시하면서 감시카메라의 필름과 배터리를 교환했다. 그러나 샘플채취, 미신고시설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거부당한다. 이때부터 북한은 IAEA에게 ‘특수 지위’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IAEA의 입장에서는 비록 ‘일시’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NPT 탈퇴효력을 정지한다”라는 말이 NPT로의 완전한 복귀를 의미하며 이것을 곧 “가입국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지만, 북한은 “탈퇴의 효력이 발생하기 직전에 이것을 잠시 정지시킨 것뿐이니 우리는 가입국도 아니고 비가입국도 아닌 여타 회원국들과는 다른 특수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IAEA의 사찰활동 범위는 자신들이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북한만이 할 수 있는 사상 초유의 주장으로, 사찰을 받는 피사찰국이 사찰을 진행하는 쪽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북한은 당 연한 듯 이야기했다.

이 ‘특수 지위’ 문제와 관련해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IAEA와 북한간의 회담이 개최되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9월 16일 블릭스 사무총장은 IAEA 이사회 및 유엔안보리에 “북한과의 대화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보고를 하였다. 따라서 9월 28일 IAEA는 총회를 개최하여 북한의 핵사찰 거부 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고 대북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북한은 10월 12일 IAEA와의 협상중단을 선언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북한이 핵 안정협정에 서명을 하고 임시사찰을 받기 시작하면서 IAEA와 북한 사이 논쟁의 핵심은 ‘북한의 과거 핵활동’이었다. 그동안 원자로에서 얼마나 많은 플루토늄을 추출하였나 하는 것이다. 이 지루한 논쟁은 샘플 실험을 통해 과학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IAEA가 북한을 압박하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궁지에 몰린 북한은 NPT 탈퇴라는 단 한 장의 카드를 던져 보여주고 게임장을 빠져 나가버렸다. 그런데 패를 잃은 북한에게 미국은 ‘탈퇴 보류’라는 조커(joker)13)를 쥐어줬다. 이때부터 논쟁은 핵심은 ‘북한의 과거 핵활동 검증’이 아니라 ‘북한이 NPT 내에서 특수한 지위냐 아니냐’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북한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강조했다. 당시 북한의 주장은 이렇게 빗대어 설명할 수 있겠다.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다가 공부하기 싫어서 교실을 뛰쳐나왔는데 반장이 달려와서 설득하는 바람에 잠시 책상 앞에 앉아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숙제를 내줘도 자기는 안 할 테고, 듣고 싶은 수업만 듣겠으며,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다시 뛰쳐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나를 평범한 학생이 아닌 특별한 학생으로 대우해 달라”, 아마도 이렇게 비유할 수 있겠다.

애초에 확실하게 ‘복귀와 완전한 의무이행’이라고 못박지 않은 미국의 잘못이 크지만, 아무튼 북한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이 그나마 1·2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의 성과라고 자위했던 것들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미국은 북한의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북한은 미국의 어떠한 요구도 들어주지 않은 셈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생떼 때문에 또다시 지루한 논쟁이 시작된다. 북한은 억지를 부리고 IAEA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는 이러한 북한을 달랬다가, 때로는 인상을 썼다가, 또 달랬다가…….

먼저 1993년 11월 1일 유엔 총회는 ‘북한이 IAEA에 즉각 협조할 것’을 140대 1의 압도적인 표 차로 통과시킨다. 물론 북한은 이를 무시한다. 11월 2일, 한국의 권영해 국방장관은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해 군사제재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1·2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생각한 미국에서도 이제 서서히 강경책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영변 핵시설에 장착된 감시카메라의 필름과 배터리가 고갈될 무렵이 되자 한국과 미국은 다시 한번 마음이 급해지고, 자꾸 시간을 끄는 것은 북한에게 기회를 주는 것뿐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11월 5일, 김영삼 대통령은 “대화 노력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최종 시한을 설정하는 문제에 대해 검토해야한다”면서 당근보다는 채찍을 미국에게 요구하였고, 한국의 야당 의원들까지 강경책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에는 다시 한번 전운이 감돌았다. 이때 북한은 △북한의 NPT 영구잔류, 특별사찰 수락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이행과 △북-미관계 정상화, 팀스피리트 훈련의 영구중단, 핵선제 불사용의 문서보장, 대체에너지와 경수로 지원 및 평화협정 체결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맞교환 하자는 ‘일괄타결, 동시이행안’을 제안한다. “경제 제재는 선전포고다, 전쟁에는 전쟁으로 맞서겠다”고 맞불을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의 미끼를 던져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는 또 하나의 협상전술이다. 미국이 이에 “포괄적인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을 할 수 있다”고 화답하여 12월 3일∼29일 뉴욕에서 비공식적인 북-미 대화가 진행된다.

우왕좌왕하는 미국

한번 걸려든 먹이를 북한이 절대 놓칠 리 없다. 자신의 실수는 성동격서(聲東擊西)를 통해 위기를 넘기고, 상대의 실수는 절대 놓치지 않고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것 또한 북한의 협상전술이다. 뉴욕에서 있은 비공식 대화에서 북한은 ‘특수 지위’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면서 감시카메라 작동이나 현재 핵시설에 대한 봉인 유지 등의 약한 수준의 사찰만 받겠다고 제시했다. 결국 대화를 통해 북한은 ‘안전조치의 지속성 유지를 위해서’ 5MW급 원자로와 방사화학실험실을 포함한 7개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또한 IAEA와 성실한 협의를 할 것이며 남북대화를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94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전향적으로 고려하고 3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을 개최하겠다는 대가를 주었다.

미국은 이것을 상당한 성과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전개된 상황은 달랐다.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북한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1월 7일∼25일 여섯 차례에 걸쳐 협상을 벌였다. IAEA는 원하는 사찰시설 및 장소에 대한 상세한 리스트를 작성하여 전달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사찰의 범위는 자신들이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합의한 것은 7개 시설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만 한 차례의 사찰을 허용하겠다”고 맞섰다. 따라서 둘 사이의 협상은 성과없이 결렬되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미국의 또 다른 실수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당시 미국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지만, 국제기구인 IAEA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즉 사찰 범위나 방법에 대해서는 IAEA와 북한이 합의할 사안이지 미국이 이래저래 간섭하고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7개의 핵시설’이라는 데 먼저 합의를 해주어 IAEA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였으며, 더구나 뉴욕 합의에서 ‘안전조치의 지속성 유지를 위해서’라는 전제를 달아줌으로써 북한이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인정해 주는 꼴이 되었다. ‘안전조치의 지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임시사찰 과정에서 IAEA가 북한에 설치해 놓은 것들(감시카메라와 봉인)의 지속성을 유지한다는 말로, 북한이 NPT를 탈퇴하는 상황으로까지 간 핵심문제인 ‘과거 핵활동 규명과 미신고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완전히 묻어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북한은 1월 13일 “미국이 안전조치의 지속성 유지를 위한 사찰만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과거 핵 규명을 시도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약속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이 고위급 회담을 개최할 의향이 없으면 북한도 열자고 하지 않겠다. 미국이 강제 제재 조치를 취하면 북한도 그에 걸맞은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다”고 발표했다. 또한 같은 날 외교부 성명을 통해 NPT 잔류를 철회하여 탈퇴할 수 있음을 밝혔다.

결국 상황은 다시 대치국면으로 가면서 2월 1일 미국 의회는 대북 결의안에 채택하여 국무부에 제출한다. 결의안은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대북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고 △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하며 △94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어서 2월 2일 페리 미 국방장관은 북한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로 넘기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2월 3일 권영해 국방장관은 94 팀스피리트 훈련이 3월 22일에 예정대로 실시된다고 발표한다. 2월 10일 한승주 외무장관은 미국을 방문, 대북 압력을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의 강경대응 분위기가 고조되자, 1월말경 북한은 방북 중이었던 빌리 그레헴(Billy Graham) 목사를 통해 북-미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 김일성의 메시지를 워싱턴에 전달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도 북-미간의 대화채널은 계속 기능을 작동한다. 결국 미국과 북한은 고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양측이 동시에 취해야할 4가지 조치를 담은 뉴욕합의를 2월 25일 발표한다.

이 합의에 따라 북한은 IAEA의 사찰을 수락하여, 1994년 3월 5일 사찰단은 평양에 도착한다. 1993년 2월 제6차 임시사찰을 마지막으로 사찰이 중단되었으니 1년여 만의 사찰이다. 그러나 이번에 북한은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사찰을 방해하였으며 2개의 미신고시설에 대해서는 여전히 접근을 차단하였다. 게다가 사찰단은 1년 전에 IAEA가 핵시설에 설치해놓았던 봉인 중 일부가 파손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한 폐연료봉의 추출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사찰을 마친 IAEA는 북한측의 비협조로 추가사찰이 어렵다고 보고 3월 21일 특별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 및 총회에 송부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3월 22일 “미국이 제3단계 고위급 회담을 끝내 거부하고 IAEA를 통해 압력을 가할 경우 NPT에서 즉각 탈퇴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뉴욕합의에 따라 남북간에는 3월 3일부터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을 갖게 됐는데, 북한은 △핵전쟁 연습 중지 △국제공조체제 포기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계획 중단 △‘핵을 가진 자와 대화하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 취소 등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에 남한 대표들이 제재를 추진하겠다고 위협하자 북한측 대표 박영수가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수가 있다”고 하여 남한은 한바탕 전쟁소동을 치르게 된다. 이 ‘불바다’ 발언은 한국 내 여론을 급속히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게 만들고, 3월 21일 UN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을 채택한다. 성명에서 안보리는 북한에 대한 후속사찰과 필요시 추가사찰을 IAEA에 주문한다.

그러던 중 4월 20일 북한이 갑자기 핵활동을 정상화하고 5MW급 원자로 내의 연료봉 교체를 곧 시행할 것임을 IAEA에 통보하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통보 내용은 “5MW급 원자로의 연료봉을 10일 이내에 교체하겠으니 IAEA가 입회하여 봉인 제거 작업을 해주고 연료봉 교체작업에 입회해달라”는 것이었다. IAEA는 이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때 교체된 연료봉에 대한 샘플 채취작업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한다. 북한은 이에 대해 “일괄타결로 핵문제를 해결한 이후에만 샘플채취를 허용할 것”이라고 답변하여 북한과 IAEA는 다시 대결국면으로 돌아간다.

5월 13일, 북한은 IAEA 사찰단이 입회하지 않은 가운데 이미 폐연료봉 교체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한다. 5월 27일, 북한이 빠른 속도로 폐연료봉 배출을 계속함에 따라 IAEA는 UN 사무총장에게 “며칠 내에 북한의 과거 핵활동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제 사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듯 번져 나간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대통령을 중재자로 내세워 방북하게 만든 ‘1994년 6월, 전쟁 전야의 위기’는 이렇게 해서 최고조에 달했다.

핵드라마의 귀결점 - 제네바 합의

이제 기나긴 시간여행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는 지금까지 1950년대 북한이 미국의 핵공격 위협에 대항하여 핵개발을 결심하던 때에서 시작하여 1994년 6월 전쟁위기의 현장까지를 살펴보았다. 이 반세기의 역사 중 북한이 핵 안정협정에 서명하고 IAEA의 첫 사찰을 받던 때로부터 만 2년의 시간동안 있었던 일들이 글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1992∼1994년은,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북한의 핵개발 현장이 외부에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여 북한을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끌어내겠다는 국제사회(특히 미국)와 그동안 핵을 보유하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리 감추고 저리 감추면서 신비화 전략을 극대화시킨 북한의 머리 싸움이 마치 한편의 추리소설처럼 숨가쁘게 전개된 드라마틱한 시간이었다.

1994년 6월 위기 이후를 짧게 소개하자면, 먼저 6월 17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부인과 경호원을 대동하고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던 순간으로 카메라의 렌즈를 돌려야겠다. 커터의 방북은 물론 그가 전직(前職)이긴 하지만 미국의 역대 방북자 중 최고위급이며, 미국 정부의 공식 임무를 받고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위기해결을 위한 민간외교관 역할을 해줄 것을 자타가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사흘간의 방북기간동안 김일성을 두 차례 만난 카터는 △북한의 핵은 군사용이 아닌 발전용이며 앞으로도 군사적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하겠다 △제3단계 북-미 고위급회담과 경수로 지원을 약속한다면 앞으로의 핵활동을 동결하겠다 △한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겠다는 큼직한 선물을 안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카터의 방북 결과에 따라 미국은 △5MW급 원자로에 핵연료봉을 재장전하지 않고 △인출한 폐연료봉을 재처리하지 않으며 △IAEA의 계속적인 활동을 보장하고 핵무기 개발계획을 동결한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준다면 미국은 대북 제재를 하지 않고 제3단계 고위급회담을 열겠다는 서한을 북한에 보낸다. 이에 북한은 곧바로 이것을 수용한다는 서면확인서를 보내준다. 이로써 위기는 한숨을 돌리고 임박했던 UN의 대북 경제 조치도 철회된다. 그리고 이어서 7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3단계 고위급 회담이 개최된다.

하지만 역사는 무미건조함을 싫어하는 것일까? 드라마틱한 94년의 시나리오는 이쯤해서는 관객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고 생각한 듯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을 무대에서 끌어내린다. 7월 9일,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을 불과 며칠 앞두고 말이다. 북-미회담은 일시 중단되고 북한에는 광신적 울음바다가 시작됐다. 남한에서는 김일성 사망에 대한 조문 논란으로 소동을 빚고, 통일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심스러우면서도 희망 섞인 관측과 함께 이러다가 우발적인 위기가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쏟아져 나왔다.

사람 세계는 이렇게 들끓었지만 핵은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문제는 북한이 5월에 인출한 폐연료봉이 6개월이 지나면 부식이 시작되어 방사능이 유출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북한으로서는 이것을 조속히 처리할 명분이 있었는데, 이를 재처리할 경우 30kg상당의 풀루토늄(핵무기4-5개분) 추출이 가능하다. 따라서 북한과 미국의 협상이 조속히 이루어져 4개월 내에 조치를 취해야할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여 클린턴 대통령이 김일성 사망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등 대단한 유화 제스처를 펼쳐 보인다. 그리하여 김일성 장례식을 마친 8월 5일 3단계 고위급 회담은 재개되고, 8월 12일 양국은 핵문제 해결을 위한 4대원칙을 합의했다고 발표한다. 내용은 △북한의 흑연감속로를 미국은 경수로로 대체해 주고 △대신 북한은 50MW급 원자로와 200MW급 원자로 건설을 중단하고 재처리를 하지 않으며 방사화학실험실을 폐쇄한다 △양국은 관계정상화를 위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무역투자 장벽을 완화해나가며 △미국은 핵선제 불사용에 대한 보장을 하고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한다 △북한은 NPT 회원국으로 잔류하며 NPT에 따르는 핵 안정협정을 이행한다는 것으로, 이는 10월 21일 서명하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문’의 기본 뼈대가 된다.

글을 맺으며

92∼94년의 전 핵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서는 이미 본문을 통해 다 전달이 되었다고 보고 글을 맺으면서 짧게 몇 가지만 정리하고자 한다.

제네바 합의 이전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첫째로 “핵을 소재로 하여 북한과 협상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강조한 바 있듯 모범적인 비핵국가들이 많고도 많은데, 북한의 불량스런 행동에 대해 오히려 당근을 줬다는 것은 국제사회에 좋지 않은 선례로 남았다. 핵은 무조건적인 폐기 대상이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핵을 통해 무언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다시는 주어서 안 된다.

둘째, 북한을 상대로 포괄적인 협상을 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 일괄타결 방식을 줄곧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이 정말 이루어지길 바라서 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선전용’이다. 그것이 되든 말든 협상해서 그렇게 해준다면 좋은 것이고 안 된다 해도 자꾸 투쟁거리를 만들어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과 같은 불량스런 지도자를 상대할 때는 한꺼번에 종합선물을 줄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한가지 하면 선물 하나를 준다는 방식으로 가르쳐 줘야 한다. 제네바 합의에 앞선 대화과정에서 보았듯 북한은 하나를 들어주면 둘을 요구하면서 상대가 더 이상 받아들어 줄 수 없는 한도까지 밀고 가다가 뭔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돌아서 버린다.

셋째, 벼랑끝 전술에는 더 강경한 전술로 맞서야 한다. 북한의 핵 위협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자신의 혈액이 든 주사기를 들고 위협하는 말기 에이즈 환자와 같다. 그는 주사기를 들고 간호사와 의사, 주위 환자들을 위협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나에게도 성적인 쾌락을 제공해주라고, 풍족한 먹을 것과 잠자리를 보장해달라고, 혹은 남은 여생을 맘껏 즐길게 수 있게 해달라고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해댄다. 물론 이런 환자를 말로 잘 타이르고 진정시켜 주사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스스로 자기 병상에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평화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자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어쩔 셈인가. 제네바 합의는 이 환자가 바라는 요구를 모두 들어준 꼴이 되었으며, 이에 맛을 들인 환자가 주기적으로 협박하는 모양새나 다름없다. 냉철한 의사라면 이럴 때는 마취총을 쏘아 쓰러뜨리던지, 다시는 주사기를 훔쳐내지 못하도록 완전히 격리시켜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자는 “그래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하는 배짱으로 대응할 필요도 있다. 물론 그 환자에게 다가가 주사기를 뺏으려는 사람이 정말 찔릴 수도 있다. 그는 에이즈에 감염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한 미치광이로 인해 수십 명이 불안에 떨고 고통스러운 것보다 훨씬 나으며, 그의 행동을 의로운 행동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한 주사기로 위협해봤자 용감한 사람에 의해 그러한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제2 제3의 미치광이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을 날이 내일 모레인 말기 에이즈 환자 한 명 때문에 온 병동이 불안에 떠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차피 기력도 없는 그에게 용감히 뛰어들어 주사기를 뺏어오고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북핵문제를 푸는 해법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