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개혁 없는 개방이란 눈속임에 불과하다
다 합쳐봤자 인구가 고작 7천만 명 정도밖에 되고 지구본을 돌려보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조그맣게 매달려있는 나라 Corea. 이 작은 나라가 무슨 힘이 그리 넘치는지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분단된 남쪽 나라인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 위에 일으켜 세운 급속한 경제성장의 신화와 1988년 서울 올림픽, 그리고 얼마전의 월드컵으로 세계인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그 북쪽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이에 못지 않게 이름을 날리고 있어, 로마제국 이후 인류역사상 최강의 힘을 자랑하고 있다는 미국이 “기필코 물리치겠다”고 선언한 ‘악의 축’ 3개 국가에 지목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명성(?)이다. 아무튼 우리 민족이 좀 ‘한 끗발 날리는’ 민족임은 확실한 것 같다.

‘북한’이라는 프리즘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이 프리즘에서 뿜어 나오는 스펙트럼이 어째 혼란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떠한 빛이 본래의 색깔인지 의문스러워 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 세계 언론은 탈북자들이 중국 내 외국공관에 잇달아 진입하여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하고 난민지위를 부여해달라고 시위한 사건을 긴급 타전하였다. 어제는 스페인 대사관, 오늘은 독일 대사관, 내일은 중국 외교부, 이런 식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탈북자들은 중국 외교가를 시끄럽게 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려다 끌려나오는 여성 탈북자의 애타는 비명소리가 뉴스를 통해 보도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이번에는 북일 정상회담이 갑작스레 열려 관심을 집중시켰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과거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였다. 13명의 피납자 가운데 8명은 사망했다고 밝혔는데, 아직 50대에도 이르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니 일본열도는 다시 한번 들끓었다. 지난해말 일본 경비정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동중국해에서 침몰한 ‘괴선박’에 대해서도 김정일은 “우리 군부에서 한 일”이라고 인정하며 사과하였다.

최근 북한은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만들겠다’고 발표하여 세계를 계속 놀라게 하고 있다. 신의주를 중국의 홍콩처럼 독립시켜 입법·사법·행정권을 부여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였으며 중국인 양빈을 특구 장관으로 임명한데다 달러를 공용화폐로 삼는 등 과거 북한의 행태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내용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번 부산아시안게임에는 적지 않은 선수단과 응원단을 보냈고, 금강산 육로 관광의 길을 뚫기로 합의해 주었으며, 경의선 DMZ 구간의 지뢰제거 작업도 시작되었다. 조금 전 신문을 보니 신의주 특구 장관 양빈은 “신의주 특구의 경찰국장을 미국인이 맡아도 좋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북한은 완연히 개혁·개방의 길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그런데 과연 북한은 개혁·개방을 시작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공할 수 있을까. 한쪽에서는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하는 탈북자들, 북한으로 송환되면 자신들은 죽고 만다는 그들의 아우성, 지금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어쨌든 시인해버린 납치와 테러·밀수의 과거. 다른 한쪽으로는 남북대화에 적극 나서고 북일 수교도 추진하며, 미국과의 대화에도 적극 응하겠다고 하고 자본주의 나라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특구를 선포하는 파격. 도대체 어느 것이 진정한 북한의 모습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해 보자. 아니, 그 전에 독자들이랑 나랑 내기를 하기로 하자. 북한의 개혁·개방이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성공할 수 없다’에 걸겠다. 그런데 나는 교묘하게도(?) 여기에 조건을 붙인다. ‘김정일이 주도하는’이라는 조건을 말이다. 딱 잘라 말하건대, 김정일이 주도하는 개혁·개방은 ‘사기’다.

내가 김정일에게 무슨 개인적인 원한이나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주위에 보면 통일 이후 남한 국민들이 짊어지게 될 경제적 부담 때문에 통일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북한의 경제가 성장하여 제 힘으로 설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북한의 변화가 정치적 혼란을 동반하지 않고 현재의 지도자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 역시 북한의 개혁·개방이 성공하여 주민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고, 김정일이 그 주도자가 될 수 있다면 적극 지지해주고픈 사람이다. 하지만 김정일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능력도 의지도 없을뿐더러 역사적 배경마저 불리하기 이루 말할 데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에 나선다 할 때 부딪히게 될 가장 큰 문제는 ‘개혁의 1차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이 개혁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그 ‘1차 대상’이 제거되지 않는 한 개혁은 영원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눈치 빠른 분들은 바로 알겠지만 그 1차 대상이란 바로 ‘김정일’이다.

혹자는 북한의 변화 움직임을 80년대 초반 중국의 개방과정과 연관지어 보려고 자꾸 노력한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80년대의 중국이 아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의 변화는 ‘탄압 받던 사람들’이 이끌었다는 것이다. 등소평 등 개방파 지도자들은 문화혁명 당시 이른바 ‘주자파’(자본주의를 추종하는 파당이라는 뜻)로 몰려 공산당에서 쫓겨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존 집권파의 국가운영이 점차 실패로 기울어가자 수 년 만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 측의 실패가 명백해지면 당연히 그 반대파에 기대를 거는 법이다. 개방파는 이때 등장하며 거침없이 자신의 이상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중국식 개혁·개방의 시작이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김정일은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국가를 이끌어 왔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 되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되었고 이때부터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며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많이 양보하여 김정일의 집권시기를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추대된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6차 당 대회로 낮춰 잡아도, 김정일은 적게는 20년에서 많게는 35년 동안 북한을 최고권력자로 군림해왔다. 곧 반대파의 정책 실패를 기회 삼아 치고 올라오면서 개혁의 명분을 얻었던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김정일은 지난 30년 간 북한을 이끌어온 책임자로서 그동안 주민의 생활을 도탄에 빠트린 장본인이다.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이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에게 중국에 와서 느낀 첫 소감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보면 대개는 ‘배신감’을 이야기한다. 철저히 속고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 말이다. 왜 그들이 입을 모아 배신감을 이야기하는지,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이 지면에 그 많은 것을 담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끔찍한 참상을 형용할 만한 말이 없다’거나 ‘인류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는 독재사회’라고 한다면 느낌이라도 조금 전달할 수 있을런지.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탈북자들의 수기나 시중에 출판된 책들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꼭 알아보길 권한다. 현재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자의 수가 3천명에 이르며, 그중 90%는 최근 5년 사이에 입국한 사람들이다. 중국에는 수십만의 탈북자들이 떠돌고 있다. 이들의 많고 많은 증언은 두었다 뭐 하려고 하는가, 찾아보시라.
김정일 자신도 답답할 노릇이겠지만, 북한이 문을 열게 되면 바깥 세상의 사는 모습이 주민들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혹자는 현재 김정일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매력을 느끼고 그러한 방향으로 북한을 이끌어 가려 한다고 진단하고 있는데,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에 남한 국민들이 누렸던 자유와 인권의 10%만이라도 지금 북한 주민들에게 주어진다면 김정일 정권은 몇 달을 못 넘겨 타도될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결국 이것을 막으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게 김정일의 목표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모순된 두 가지를 억지로 짜 맞춰 보려는 무모한 도전일 뿐이다.

개혁이 빠진 개방이란 마술사의 손놀림처럼 순간적인 눈속임에 불과하다. 김정일이 권력을 내놓고 퇴진하여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면서 실질적인 개혁과 개방의 길에 오를 것이냐, 궁지에 몰려 내놓는 좌충우돌의 정책만을 되풀이하다 어느 한 순간 급격한 붕괴와 혼란에 직면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흔히 ‘김정일 퇴진’을 주장하면 북한의 하드랜딩을 주장하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정일을 반대하는 세계적 여론을 형성하여 아주 미약하나마 이러한 바람이 북한 주민들에게 자꾸 전달되고 이를 통해 북한 내에 민주화세력이 자라나 힘을 얻고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소프트랜딩’이며, 애당초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할 권력자에게 자꾸 미련을 가지고 의지하다 뒤통수 맞는 것이 오히려 하드랜딩 아닌가.

김정일에게 기대를 거느니 나는 북한 주민들의 가슴 한 구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을 민주화의지에 기대를 걸겠다. 아참, 앞에서 내기를 제안하면서 무엇을 낼 것인가 정하지 않았다. 자장면 한 그릇 사주기가 어떤가. 만에 하나 김정일 개과천선하여 과거의 죄행을 북한 주민들 앞에 엎드려 사죄하고 개혁개방의 길에 들어선다면 기쁜 마음으로 서울예대 학생들 모두에게 자장면 한 그릇씩 흔쾌히 내겠다. 그 날 대운동장으로 모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