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입장에서 절대적인 전제가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계속적으로 추진해갔을 때 수령절대주의 체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러한 근본적 딜레마속에서 정책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현재 처해 있는 조건의 핵심은 첫째는 오랫동안 계속된 경제난이요, 둘째는 9.11 테러 이후에 변화된 국제환경이다. 오랫동안 계속된 경제난 때문에 기존의 배급체제는 붕괴된 지 오래이며 인민들이 직접적인 매매활동 등을 통해 식량과 생필품을 조달해왔다. 그래서 인민들 속에서 불만이 고조되고 빈부격차가 커지고 정부의 통제력은 계속 붕괴되어 갔다. 이러한 조건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외부의 원조로 약간 나아진 상황에 힘입어 과거의 시스템을 복구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봤지만 이미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정부의 통제능력을 회복하고 인민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물가임금 현실화정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리고 9.11 테러 이후의 변화된 국제환경에 얼핏 북한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북한의 입장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고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공격을 하고자 하는 강경한 태도를 계속 유지시켜 나가자 어떻게 해서건 향후 몇 년 동안 미국의 예봉을 피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미국 정치권의 여론을 북한에 유리하게 바꿔 놓든지 그것이 힘들면 최소한 남한의 여론만이라도 북한에 유리하게 바꿔 놓아야 할 입장이다. 미국은 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남한의 입장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상봉 재추진 - 월드컵 방송 - 물가임금현실화 - 남북회담 재추진 등이 모두 이러한 조건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서해교전이다. 서해교전은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북한측의 계획적인 도발이 명백하고 또 북한의 실정 상 김정일의 승인 없이 이러한 도발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그러나 이것은 김정일의 그 유명한 ‘잔재주’의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이 ‘치고 빠지기’의 하나인지 ‘남북관계 개선 효과 극대화’를 노린 것인지 이것저것이 결합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그 속셈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잔재주’의 하나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그렇다고 할 때 이후 정세의 핵심적인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북한이 이후에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할지의 문제는 불확실한 측면이 많다. 북한의 입장에서 기업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특히 임금을 현실화한 조건에서는) 많은 노동자들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공장가동률이 10∼20% 밖에 되지 않는 조건에서 현재의 노동자에게 모두 임금을 지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만약 실업자가 양산된다면 소자영업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이런저런 형태의 소상인들이 많이 생겼는데 이를 체제 내로 흡수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간다면 실업자 중에 자영업자로서의 자생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공장가동률이 극히 떨어진 조건에서 공업생산을 조금이나마 보충하기 위해 소기업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갈 수도 있다. 또 부분적인 농업개혁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리고 외부의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 지역의 특구 조성도 계속 추진해갈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극심한 경제위기를 타개해 나가고 정부의 통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 위한 필요와 미국과 남한 여론을 호전시키기 위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중장기적으로 개혁개방으로 나아갈지는 불확실하다. 북한의 입장에서 절대적인 전제가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계속적으로 추진해갔을 때 수령절대주의 체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러한 근본적 딜레마 속에서 정책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여 년 동안 북한에서는 ‘당만 믿고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던 정직하고 충직한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 이는 탈북자들의 일관된 증언이다. 만약 북한 정부에서 앞으로 국가 총 노선에 대한 명시적 표명 없이 부분적인 시장제도를 도입 하든가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하는 정책을 지속할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정직한 사람들의 생활처지는 더 비참해질 가능성이 많다. 정직한 사람들은 평소에는 불만을 표현하지 않지만 일단 분노가 폭발해 일어났을 경우에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은 이들이 일어났을 경우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현재 북한에서 모든 영역에서 만연되어 있는 부정부패와 북한 정부의 최근 10여 년 동안의 각 종 정책과 국가운영방식은 점점 정직한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