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북한, 그 의미는 무엇인가
북-중 국경을 넘나드는 무산 청년을 만나다
-7월 1일부터 임금을 15배 인상한다고 발표
-국정가격은 장마당 가격 수준으로 인상
-무산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임금 대신 토지를 나누어 줘
중국에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러 간 사람들은 누구나 가장 최근에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필자 역시 우선은
가장 최근에 강을 건넌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물론 국경지역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지금은
국경경비가 삼엄해져 쉽지 않지만, 몇 해 전에만 해도 건너편에서 넘어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는 운 좋게도 일주일 전에 중국으로 온 탈북자가 있다는 소식을 바로 들을 수 있었다. 수소문해 그를 찾았고,
한 식당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함경북도 무산에서 온 이 친구는 이제 갓 스무 살의 청년이다. 이름은 정재국(가명).
국경을 넘나드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는지 그는 여러 번 중국을 왔다 갔다. 복장도 깔끔하고, 중국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안다. 그는 중국에서 PC방에도 여러 번 드나들어 한국 신문도 보고, 각종 인터넷 사이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와는 두 번 만났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서로 소개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최근의 북한 소식에 대해 들어보았다. 꽤나
시끄러운 장소에서 만난 탓에 인터뷰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를 수소문하였고, 며칠 후 어렵사리
두 번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두 번째 만나는 날 그는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한동안 먹지 않던 것을 갑자기 먹으니
배탈이 난 듯 했다. 비상약품이라도 있으면 건네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안타까웠다.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에서
했던 이야기를 재차 확인하는 선에서 간단히 마무리했다.
첫 만남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 중 특징적인 것은 ▲ 임금을 15배씩 인상한다는 것과 ▲ 노동자들에게 임금대신 토지를
분배해주고 거기서 나는 수확물을 알아서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임금을 15배 인상한다는 것은 다른 탈북자들도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17∼20배까지 이야기되는 지역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임금을 대폭 인상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했다. 그리고 그 시행일자는 7월 1일이라고 했다. 이것도 모두 일치한다. 필자가 7월 1일
이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그 시행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는데, 그 시행가능성에 대해서는 탈북자들의 견해가 조금씩
달랐다.
재국 씨는 이러한 임금인상조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갑자기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나서 임금을 올리나”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국가에서 돈을 왕창 찍어 나눠주면 되지 않나”라고 웃으며 물으니 “제가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돈을 막 나눠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쯤은 안다”고 그 역시 웃으며 답했다.
노동자들에게 임금대신 토지를 분배해준다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는 재국 씨에게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 뒤에 인터뷰한
탈북자들에게도 전혀 듣지 못한 증언이었는데, 나중에 무산 출신 다른 탈북자가 똑같은 증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다시 확인해본 결과 이것은 ‘무산에서만’ 들려오는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무산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실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돌리자면, 최근 북한의 실정과 관련해 들려오는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이러저러한 정책들이 실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지역마다 약간씩 틀리다. 예를 들어 임금인상의 폭이 지역마다 약간씩 틀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행시기를 양강도 사람들은 7월 1일이라고 이야기하고, 함경도 사람들은 10월 1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에 와서
신문을 보니 8월 1일부터 실시한다는 지역도 있다. 또 앞서 본대로 무산지역은 노동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임금지급을
대신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증언을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다. 온성이나 회령에서는 토지 1㎡를
12원에 판매했다고 하는데 이 증언도 딱 두 지역에서만 들을 수 있는 증언이지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다. 여기에
담겨있는 의미를 섣불리 해석해 볼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최근 들어 북한에서 무언가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려는
조짐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 언제 들어왔는가?
“5월 20일에 넘어왔다. 연길에 도착한 것은 5월 25일이다.”
- 중국에는 언제 처음 왔나?
“99년, 그러니까 내가 17살에 처음 들어왔다. 조선이 한참 식량난 겪고 있을 때 중국은 쌀이 남아서 사람들이 쌀밥
먹기도 싫어한다는 소리를 듣고 과연 그게 사실이겠는가 궁금했다. 그래서 배가 고프기도 하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넓은
세상 구경이나 좀 해두자는 생각에 강을 건넜다. 사실 북한에 있으면 철길구경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 철길을 못 봐요?
“조선은 통행증 없으면 자기 고장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니까, 그런 경우야 없겠지만 만약 자기 동네에 철로가 없으면
기차 구경 한번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 바다는 봤는가?
“나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차가 정상적으로 달린다면 우리 집에서 두시간이면 바다를 볼 수 있는데, 아직 바다를
볼 생각은 못해봤다.”
- 중국에 와보니까 어떻던가?
“희한한 측면도 있고, 힘든 측면도 많다. 일단 조선에는 없는 것이 많으니까 올 때마다 신기하긴 한데…, 예전에는
조선족들이 그래도 동포라고 북조선 사람들에게 잘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99년 정도부터는 조선족들이 탈북자들을 싫어한다.
탈북자들이 자꾸 늘어나고, 또 그들을 도와줬다가 피해를 많이 보니까 그렇다. 요새는 조선족들한테서 조그마한 도움도
받기 힘들다. 심지어 밥도 안 먹여준다.”
- 이번에 넘을 때 국경경비는 어떻던가?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 그래도 들어올 때는 좀 헐하다. 조선에 있다가 중국 쪽을 향해 냅다 뛰면 일단 다른 나라로
가버렸으니까 아무리 경비대가 많아도 쫓아오지 못하는데, 문제는 ‘돌아갈 때’다.”
- 조선으로 들어갈 때 잡히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뭐 일없다. 단련대에서 몇 달만 고생하면 된다. 이제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잡혀서 단련대도 꽉 찼다.”
- 조선의 보위원들이 중국에까지 들어와 탈북자들을 잡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옳다. 그런데 보통 탈북자들을 잡는 게 아니고 북조선에서 수배대상들을 잡는 거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북조선으로
송환되어간 사람들의 밀고로 잡힌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 어디에서 누구를 봤는데 그는 수배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보위부에서 중국에 잡아줄 것을 의뢰하는데, 중국 측에서 자기네 혼자서는 잡지 못하겠다고
하면 보위원들이 중국으로 들어가 같이 협동해서 잡는다.”
- 직접 본 적이 있나?
“나는 직접 보지 못했고, 북조선 보위원 3명과 중국공안이 함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는 탈북자 한 가족을 끌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 보위원들은 중국에서 군복을 입고 다니나?
“사복(私服)하고 다닌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올해 3월 한국의 몇 개 일간지들은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 사건 이후에 대대적인
탈북자 검거를 위해 북한 보위부원(일명 ‘특무’) 150여명이 중국에 파견되어 가가호호 수색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중국 공안이 대대적으로 탈북자 검거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북한 특무들이 직접 중국의 가정집을 수색한다는
것은 상당히 과장된 증언이다. 아니, 거짓에 가깝다. 심지어는 인민군 복장을 한 채 중국에서 활동중이라는 증언도 있는데,
중국도 주권국인 이상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재국 씨의 이야기처럼 중국 공안의 협조요청이 있을 때 북한 보위원들이
출동한다는 증언은 있으나, 북한 보위원들이 마치 중국 공안처럼 중국 땅을 활보하고 다닌다는 증언은 들어보질 못했다.
또 지난 4월에는 한 미국인의 목격담이라며 “두만강변의 중국 투먼(圖們)에서 정복을 입은 북한 보안원들에게 체포된
탈북자 100여명이 코와 손을 철사로 꿰인 상태로 트럭에 실려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보도도 있었다. 단정하기 힘들지만
이것도 거짓으로 보인다. 투먼의 경찰서 앞마당에서 그러한 만행을 저질렀다는데,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국경지역에
크게 소문이 난다. 한두 명도 아니고 100여명의 코를 꿰었으니 굳이 그 미국인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적지 않게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의 코를 꿰어 짐승처럼 끌고 갔다”는 증언은 90년대 중반에 많았다. 목격자도 여럿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최소한 국경지역에서만큼은 북한 보안원들도 어느정도 신사적(?)으로 탈북자들을 대한다. 굳이 세상에 드러날 만큼
가혹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한 증언이 튀어나왔을까. 그 미국인이 잘못 보았든지, 탈북자
강제송환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려고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좋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낼 필요는 없다.
- 인민보안성 보안원(한국으로 말하면 ‘경찰’)들의 복장이 바뀌었다는데?
“그렇다. 4월 11일에 바뀌었다.”
- 어떻게 그렇게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나?
“그날 좀 우스운 일이 있었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생일날(4월 15일)에 세대 당 과자를 나누어주는데, 보통 국영상점에
이것을 보관해 둔다. 그런데 4월 9일에 이것을 도둑맞았다. 다음 날 보안원들이 조사하러 왔는데 예전의 국방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상점 앞을 지나가니 계속 조사중인데, 옷을 모두 새까만 것만 입고 왔더라. 그래서 4월
11일에 바뀐 걸 기억한다.”
- 올해 김일성이나 김정일 생일날에는 어떤 선물이 있었나?
“그저 기름 같은 거 100그램씩…, 그리고 과자가 세대당 한 킬로그램…, 그 다음 비누, 칫솔…, 이런 것들.”
- 쌀은 주었나?
“입쌀 같은 것은 없고 강냉이(옥수수)만 이틀분 받았다. 강냉이 하루 배급량이 450그램이니까 한 킬로도 안되는 양이다.”
- 배급주는게 지역마다 틀리나?
“지역이나 기업소 사정에 맞춰서 준다. 무산광산은 쌀을 좀 줬다고 들었다.”
- 예전에 조선 열차에는 유리창이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최근에는 차차 열차에 유리를
다시 끼웠다는 소리가 있는데?
“완전히 다 끼운 건 아니고 몇군데 끼우고 있다.”
- 무산 광산은 버스가 새로 왔다고 하는데.
“거짓말이다. 원래 버스가 두 대 있었고 김정일이가 지난해 11월달인가, 버스를 보내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가 오면 뭐하는가, 기름이 없어 뛰질 못하는데.”
- 북한 사정이 차차 좋아진다고 볼 수 있는가?
“이제는 거의 정상궤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배급이 공급되지는 않지만 인민들 자체가 살 수 있는 생활력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국가가 통제만 하고 있다.”
- 지금이 몇 년도 상황과 비슷한가?
“93, 4년 정도와 비슷하다. 97, 8년에 어려움이 가장 절정에 달했다가 지금은 93, 4년과 거의 비슷해졌다.
그러니까 93, 4년도에도 식량공급은 안됐지만, 사람들이 자체로 장사를 하든 뭘 하든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지금도 공급은 없지만 사람들이 어떻게든 노력의 대가를 충당하고 있다.”
여러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북한 인민들의 생활조건이 차차 나아지고 있느냐,
아니면 점점 악화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여전히 바쁘다(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몇 시간동안 이런저런 상황을 요해하면서 들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사는 게 점점
나아지고 있다. “아직도 배급은 없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지만 철도, 전기, 치안, 교육 등 여러 분야가
차츰 회복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앞서 잠깐 소개하였듯, 좀 황당하고도 엉뚱한 정책이긴 하지만 둘쑥날쑥 뭔가
실험되고 있는 증거도 포착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독재자의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것
은 무리다. 뒤에 다른 탈북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자세히 소개되겠지만 북한 인민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것은 “이제 죽을 사람들은 다 죽고”, “예전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생활이 이젠 익숙해져 가기 때문”이다.
- 노동자들에게 임금대신 땅을 나누어준다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다. 임금을 줄 수 없으니까, 그 임금에 해당하는 만큼의 땅을 주는 거다. 그 땅에 뭘 심어 키우든 알아서
하고, 거기서 난 것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 그게 언제부터 실시되었나?
“올해부터 실시되었다.”
- 땅을 나눠주니까 사람들이 대단히 좋아하겠다.
“모르는 소리다. 사람들이 ‘이중착취’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장 일을 하고, 또 농사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공장 노임을 주면 되지 왜 귀찮게 땅으로 줘서 고생하게 만드느냐고 불평한다. 그리고 종자 같은 것을 장마당에서
사야 하는데 그 돈도 만만찮다. 아직 수확기가 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거둘 때가 되면 도둑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또 밤새 자기 밭을 지켜야 한다. 이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 어떤 방식으로 땅을 나누어주나?
“이 땅에서는 어떤 곡식이 어느 정도 생산되고 그것을 내다 팔면 얼마 정도의 돈이 생긴다는 자료가 다 있다. 그것을
토대로 자기 노임에 맞춰 나눠줬다.”
- 이 제도가 성과는 좀 있는가.
“모르겠다. 가을에 가봐야 알겠다.”
- 월급을 올리고 장마당 가격을 고정시킨다는데, 이 제도는 실시되고 있나?
“그런 안(案)이 있긴 한데, 줄 돈이 없어 정말 실행될지는 모르겠다. 국가은행에도 돈이 없는데 말이다. 이미 4월부터
월급 올리는 거 실시한다고 말하고 월급을 15배씩 올렸는데 은행에 돈이 없어서 못줬다. 종전에 100원씩 주던 돈도
못 주는 돈이 많았는데 지금 15배 올린다고 해서 어디서 나서 돈을 주겠나?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말로만 그런다.”
- 북-중 국경에서 무산 땅을 내려다보니 소나 염소를 많이 키우던데?
“소는 개인이 키우지 못하고 염소는 제한 없이 많이 키운다. 염소를 키우는 집은 전문적으로 키운다. 그 사람은 전문적으로
염소를 키우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 염소도 키우고 집체(집단) 것도 키운다. 이런 직업이 최근에 생겼다.”
재국 씨의 이 말을 이해하자면 ‘위대하신’ 김정일 동지의 방침 중 하나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때는 바야흐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정일이 식량난을 타개할 묘책으로 인민들에게 ‘고기를 배불리 먹일’ 계획을 세운다. 풀 먹는 집짐승…,
그러니까 소, 염소, 양 등을 많이 키우라고 지시한다. 스위스식 모범이란다. 이 계획에 의해 우선 현대식 풀판을 조성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황해도 신계, 평안남도 신양, 함경북도 나선, 강원도 세포 등은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기업소마다 염소를 대대적으로 키울데 대한 방침이 내려온다. 사람들이 배고파 공장에 출근도 못하는 판에 어떻게
태연히 염소를 키우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김정일의 지시니 실시 안 할 수는 없고, 그래서 기업소마다 ‘염소 담당’
노동자가 생겼다. 그는 출근은 안하고 염소만 키운다. 염소를 키워서 기업소의 할당량을 채우면, 모든 가동(근무)일수를
채운 것으로 해준다. 이것은 협동농장도 마찬가지여서 돼지를 키우게 되어있는데, 전문인들이 돼지를 키우고, 키운 돼지를
바치면 가동일수로 삼는다.
- 외화벌이 동원은 많이 하나?
“지금도 약초를 캐고, 송이 같은 것은 기업소 별로 과제가 떨어져서 수행한다. 송이버섯과 같은 주요한 수출원은 국가가
틀어쥐고 있다. 군(郡)마다 ‘5호관리부’라는 게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외화벌이 기업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서는
송이버섯 같은 것을 주민들이 캐오면 사탕가루나 기름 같은 걸로 바꿔준다.”
- 부모님은 뭘 하시나?
“장마당에서 쌀장사를 하고 있다.”
- 쌀은 어디서 나나?
“사 가지고 되거리 장사를 한다. (‘되거리 장사’란 장마당 입구에 서 있다 쌀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재빨리
사다가 장마당 안으로 들여와서 더 비싼 가격에 파는 것을 말한다.) 개인들한테서도 사고 국가에서 몰래 빼내온 것을
사서 뒷거래로 장마당에 내다판다.”
- 장마당 쌀값이 얼마나 되나?
“입쌀이 한 킬로에 70원 정도 한다. 강냉이는 한 킬로에 25원 정도다. 그런데 노임이 오른다니 지금 값이 올라가는
추세다.”
- 장마당에 나와 있는 게 뭐가 있나?
“장마당에는 뭐 없는 게 없다. 고양이 뿔 빼놓고는 다 있다. 텔레비전, 녹음기, 옷…. 흑백 텔레비전은 4∼5000원,
채색(컬러) 텔레비전은 최고 2-3만원까지도 있다.
- 한국 상품도 있나?
“한국 전자제품은 크게 보지 못했고, 피복 같은 거는 한국 아니면 일본제가 많다.”
- 한국 옷은 눈에 띄지 않나?
“한국 옷은 뭐 크게 통제 안한다. 지금은 뭐 청바지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젊은 층은 화장, 머리단장이
많이 달라졌다. 쌍꺼풀도 하고, 입술도 바르고…, 아직 머리에 물감들이고(염색하고) 다니는 것은 없지만, 중국문화가
많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 한국에서 월드컵 하는 것은 알고 있나?
“알고 있다. 내가 올 때에는 젊은 층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조선은 소문이 빠르다.”
- 그런데 전기가 없는데 텔레비전을 어떻게 보나?
“전국이 한꺼번에 다 전기를 꺼버리는 건 아니다.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는 지역도 있고 못 보는 지역도 있다. 일부에서만
월드컵을 보더라도 소문을 모를 수 없다.”
한국팀의 월드컵 예선 경기를 필자는 중국에서 보았다. 미국과의 예선전은 탈북자와 함께 중국의 한 음식점에서 손에 땀을
쥐며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체포의 걱정 같은 것은 잊고 오직 응원에만 열을 올렸다. 재국 씨는 월드컵 개막식 이전에
국경을 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편집하여 보여준 월드컵 경기를 보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개막식
훨씬 이전부터 남조선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소문은 모두 중국과 북한을
왔다갔다하는 탈북자들의 ‘소문의 위력’이다.
- 조선에서 최근에 식량난 시기의 비참함을 다룬 ‘자강도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으로 아는데, 봤나?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봤다. ‘자강도 사람들’과 비슷한 영화로 ‘편지’라는 영화가 있는데, 처녀들이 도시락을 싸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싸와 서로 울고…, 뭐 이런 내용으로 북조선 실태를 많이 노출시켰다. 그 영화 처음 볼 때는 사람들이 다 운다.
북조선에서 그런 영화까지 다 돌리는 정돈데 아직도 남조선 사람들이 북조선 실태를 이해하지 못한다니, 도대체 모르겠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시체를 미처 처리도 하지 못하게 살았는데, 왜 아직도 인정을 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다 미국이 봉쇄정책을 쓰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한다.
“조선 사람들도 많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실지는 봉쇄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봉쇄를 당한다고 해도 굶어죽는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거다. 미국이 봉쇄한다해도
중국하고만 문을 열어도 괜찮을 건데, 그것마저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왜 남 탓을 하는가, 제 탓이지.”
‘자강도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묻자 재국 씨는 남한 사람들에 대한 불만까지 늘어놓았다. “왜 북한의 실정을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미국의 봉쇄정책 때문에 북한의 위기가 심화된 것 아니냐”는 일각의 의견에
대해서도 ‘정답’을 내놓았다. “우방인 중국을 향해서 만이라도 문을 열면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 여전히 중국
국경을 넘는 것조차 역적으로 잡아 가두니 그렇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중국하고 만이라도 문을 연다면 북한의 형편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열지 않는 것일까? 김정일은 개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디로의 개방이든 말이다. 결국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의 생존’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 유지’다.
이러한 인간말종을 우리는 언제까지 얼르고 달래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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