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이진선의 日記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 <아름다운 집>. 이 책이 어떤 책인가를 소개하는 데는 간단치 않은 설명과 분석이 필요하겠다. 이 책의 90% 이상은 '이진선'이라는 사람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진선은 추정컨대 1920년생으로 충남 충주 출신이다.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前身) 재학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혁명가가 되었고 해방이후 해방일보 기자, 로농신문 남조선부 기자, 민주청년 공산주의교양부 기자를 거쳐, 부주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좌천, 교정부원으로 쫓겨나 한직을 머물다 정년 퇴직, 1998년 10월 10일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 책은 이진선이 연희전문에 입학하던 날인 1938년 4월 1일부터 생을 마감한 날까지의 일기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해방이후 월북하여 평생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살다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책의 90%이상은 이진선의 일기이지만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에 두 차례 '편집자'라는 사람이 끼어 든다. 이 편집자는 한 신문사의 기자이다. 어느 날 그는 연변에서 걸려온 엉뚱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밑도 끝도 없이 시간과 장소를 못박아 놓고, "조선사람들이 깜짝 놀랄 기록을 넘겨주겠으니" 연변으로 날아오라는 것이다. 기자의 직감으로 무언가 있음을 짐작한 '편집자'는 연변행 비행기를 타고, 약속된 곳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보따리 하나를 넘겨주며 이 것을 책으로 엮어 줄 것을 부탁하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그 보따리에 든 것이 바로 이진선이 60년 동안 쓴 일기 뭉치 - 이 책 <아름다운 집>의 '원판'이라 할 수 있다. 편집자는 이진선의 일기를 밤새워 읽고 이를 옮긴다. 그리고 이렇게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을 '논픽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종의 '안네의 일기'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표지에는 '손석춘의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 책을 '논픽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용중에도 논픽션처럼 보이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해 놓았다. 예를 들어 "맞춤법을 현대 표준어에 맞춰 문장을 가다듬었다"든지, "예스런 종결어미와 군데군데 섞어 쓴 한자를 그대로 살리는 것은 더욱 큰 모험이라는 판단이 들었다"는 토로, "깨알처럼 작은 글자들 위로 겹쳐진 흘림체의 촘촘한 가필들은 더러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어려워 안경은 물론 큰 돋보기로 몇 시간을 들여다보기도 했다"는 설명 등은 논픽션이라는 착각을 불어올 만하다. 특히 손석춘씨는 한겨레신문 여론매체부장으로, 꽤 알려진 언론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편집자'의 직업도 기자로 손석춘씨가 1인칭 시점에서 쓰고 있으니, 독자들은 그야말로 "손석춘씨가 한 익명의 노인으로부터 수첩을 건네 받아 약속대로 펴낸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라고 한다. 이 책을 소개한 한겨레신문 서평에도 "현직 신문사 부장이자 언론운동가로도 잘 알려진 손석춘씨가 소설가로 변신했다"(2001년 6월 4일자)고 운을 떼고 있다. 또 "손석춘씨가 '작심'하고 쓴 소설"(한겨레 2001년 9월 22일자), "치밀하게 현대사를 되짚어 살려낸, 실화보다 더 실감나는 소설"(들녘출판사 보도자료), "등단작"(한겨레 2001년 6월 4일자)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소설일까? 소설이라면 '창조한 이야기'라는 말인데, 이 책은 소설이라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이 책을 소개하는데 왜 "간단치 않은 설명과 분석"이 필요한지, 그 이유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아름다운 집을 가치 있게 읽는 방법

크게 볼 때, 답은 명료하다. 둘 중 하나다. 픽션이거나 아니면 논픽션이거나.

만약 이 책이 픽션 - 소설이라면, 이진선의 일기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 손석춘씨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경의(敬意)'를 표하고 싶다. 이토록 열심히 현대사를 공부하고, 특히 북한의 현대사를 파헤치고, 북한 체제의 왜곡 과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방대한 자료수집과 조사, 연구, 분석 능력 역시 갈채를 보내고 싶다. 완벽하게 논픽션처럼 보이게 만든 그 치밀한 구성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부러움의 찬사를 드리고 싶다.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투여됐을 듯 싶다.

그런데 만약 이 책이 논픽션이라면, 즉 이진선의 일기가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손석춘씨가 책을 펴낸 것이라면, 정반대의 평가를 해주고 싶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렇다면 손석춘씨는 상당히 비겁하다. 무엇보다 이진선이라는 사람의 인생중 60년의 기록을 자신의 소설로 만들어버렸으니 비겁하다. 정보제공자와 어떠한 사전 교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정말 이진선의 일기가 존재한다면, 이 책은 "이진선의 생생한 한국현대사 보고"이지 '손석춘의 소설'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추측도 가능하다. 이진선의 일기는 원래 존재하고 손석춘씨가 이를 입수한 경로도 책 중 소개와 비슷한데, 이를 원문 그대로 소개할 수 없는 어떠한 이유가 있어 손석춘씨가 가필(加筆)하여 윤색한 경우이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손석춘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60년 동안 이를 기록한 이진선의 뜻, 그 시간적 넓이와 깊이 까지를 존중한다면, 손석춘씨는 이진선의 기록을 독자들 - 역사적 후대들 - 에게 고스란히 전할 의무가 있다. 가필하고 윤색했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설명해 줬어야 한다. 그런데 손석춘씨는 이것을 소설이라 짧게 못박아버렸다. 모든 것을 '허구'로 돌린 것이다. 우리가 이 대단한 작품 앞에 끝까지 속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지금껏 이 책이 픽션이냐 논픽션이냐의 기준을 '이진선의 일기'의 실제 여부에 대고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쓸데없는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진정한 픽션과 논픽션의 기준은, 이진선의 일기가 실제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이다. 이 책은 이진선의 일기를 통해 해방전후 사회주의자들의 투쟁과 분단이후 북한사회, 특히 북한에 수령절대체제가 공고화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왜곡하였느냐가 픽션과 논픽션의 기준이 되어야지, '이진선의 일기'라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참고로 이 책에는 소설로 보이기(?) 위한 몇가지 장치를 두고 있다. 우선 독자들이 '편집자=손석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등식을 억지로 깨고 있다. 책에서 드문드문 끼어 들고 있는 '편집자'는 빨치산의 아들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1969년에 대학에 입학했고 1976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은 손석춘씨의 실제 약력과 다르다. 빨치산의 아들이라면 유복자라 하더라도 최소한 1953년생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손석춘씨는 1960년생으로 70년대 후반 학번이며, 80년대 초반에 입사했다. 그렇다면 소설의 내레이터인 '편집자'는 허구인 셈이다. 이 책의 내용중 가장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허구라고 할 수 있다. 또 이진선이 일제시대 만났던 비구니와 해방이후 취재과정에서 만난 여기자, 그리고 민주조선 재직시절 사랑했던 최진이가 모두 동일인물이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소설적'인 부분이다. 또 이 책의 대부분인 '일기'를, 숨막히는 일제 말 지하투쟁의 과정에, 그리고 전쟁의 포화속에, 더구나 70년대 유일사상체계확립의 광풍 속에 간수해왔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현상의 권총을 50년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그 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도 '소설적인' 부분이다. 이렇게 소설적인 장치를 도입한 부분을 찾아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사회주의자의 理想

자,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이 책의 제목인 아름다운 집. 여기서 '아름다운 집'은 사회주의 사회, 혹은 이상사회를 의미한다.

"우리 아들이 혁명이 뭔지 알까?" "그럼요. 왜 몰라요." 서돌이의 해맑은 눈이 다소 진지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살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거예요. 맞죠?" (50년 9월 20일의 일기 중, 134∼135페이지)

한국전쟁이 시작하던 날 이진선이 평양 집을 떠날 때 네 살배기 아들과 나눈 대화이다. 이진선은 평생 이 '아름다운 집'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일기는 38년 4월 1일에 시작한다. 대학 신입생 시절 '허무'라는 자기 나름의 철학적 화두에 심취하기도 했던 이진선은 '식민지 시대 지식인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던 중 사회주의자가 된다. 모든 사람이 아름답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 너무도 순박한 이런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 된다. 그러나 그것은 말그대로 이상일 뿐, 이 책은 한 지식인이 꿈꾸는 '아름다운 집'이 현실 속에 어떻게 굴절되고 저주받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책의 앞부분이 다소 따분하게 느껴지는 독자는 해방 이후의 일기부터 보아도 좋다. 편집자의 군말 역시 그냥 넘겨버려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집'에 대한 이상은 먼저 소련의 지원 하에 김일성이 등장하면서 어두운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진선은 김일성이 극구 조선노동당 북조선 분국을 주장하고,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갖는다.

"1국 1당의 원칙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깨졌다. 김일성 동지를 중심으로 한 북조선 동지들이 혁명의 한 길을 걷는 동지라기 보다는 권력욕 짙은 정치인으로 점점 다가온다" (46년 8월 30일의 일기 중, 105페이지)

"평양에 북조선중앙박물관 현대사실(現代史室)이 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조선에 이를 소개하기 위해 평양에 다녀왔다. 놀라웠다. 온통 김일성 장군 투쟁기록이다. 1925년 이래 국내에서 줄기차게 벌어진 혁명투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47년 8월 13일 일기 중, 114페이지)

전쟁중 상처를 입고 아내와 아들을 잃은 이진선은 박헌영의 소개로 모스크바 유학길에 오른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한 러시아 여성으로부터 별장에 초대를 받는다. 그 여성은 당시 소련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이었다. 그 별장의 우아함과 거대함에 이진선은 오히려 실망한다. 사회주의자답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상은 앙드레 지드가 러시아혁명이후 소련공산당의 초대를 받고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받은 그것과 비슷하여 흥미롭다.

"크룹스카야의 그림 같은 별장이 이다금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가슴 한 켠에서 뭉게뭉게 떠오른 의혹이 있다. 모든 인민이 이런 별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크룹스카야의 아버지는 공산당이 고위 간부 아닌가. 전 세계혁명의 전위이어야 하지 않은가. 모두가 고루 잘사는 사회가 이루어질 그날까지 내핍생활은 아니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하지 않은가. 혹 내가 언젠가 누가 말했듯이 너무 철없는 이상주의자일까."(1952년 11월 5일 일기, 148페이지)

이 정도만 보아도 이진선은 무척 순진한, 너무도 순진한 사회주의자 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순진함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건지지만 그의 동료들은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처형을 당한다. 박헌영, 이승엽, 임화 등의 사형집행이 있는 날 이진선은 "솔직히 고백하자! 무섭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다!"라고 쓰고 있다.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처단하고 동지들을 죽이는 소용돌이 속에 이진선은 "정오의 광활한 사막에 나홀로 남은 심정"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전초전'에 불과했다.

인민의 敵

이 책의 절반 이상은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발표된 이후 북한사회가 어떻게 수령절대체제로 변해가는지, 그것을 지켜보는 이상적 사회주의자 이진선의 좌절과 배심감을 담고 있다. 익히 알다시피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령중심의 봉건사회로 타락시킨 시발점이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에 의해 시작하였으나 이를 한층 강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장악을 위한 도구로 백 배 활용한 사람은 김정일. 이진선의 1967년 8월 29일 일기를 살펴보자.

"16차 전원에서 김영주 동지가 제안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채택된 뒤 전국 곳곳에 김일성 수상 동지의 동상이 건립되고 있다. … 중략 … 유일사상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가. 굳이 따지자면 한낱 정책노선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일러 사상, 그것도 유일이라는 이름으로 당 전체에 확립하려는 모습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개인 숭배의 극한적 형태가 아닌가. … 중략 … 혈연으로 후계자를 정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는 오늘을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231페이지)

이어서 한달 후 그는 "공화국 도시와 농촌 곳곳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인민들을 위해 출판되어온 모든 서양 문학들을 반복고주의와 반수정주의라는 구호아래 단속해가는 공화국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다.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수기에서 성혜랑은 "전쟁때 나는 미국 비행기가 손바닥만한 도시에 하루에 수백 개의 폭탄을 던진 때도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껴본 일이 없었다"라고 쓰고 있다. 유일사상체계 확립이라는 미명 하에 수령우상화와 우민화(愚民化)를 위해 얼마나 철저한 분서갱유를 펼쳤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진선은 68년 1월 3일의 일기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유일사상이 당을 화석화하는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공화국 모든 인민의 삶을 화석화하지 않겠는가"하고 걱정한다. 그러면서 이 순진한 사회주의자는 "그것은 당의 퇴보,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명백한 후퇴"라고 일기를 끝맺는다. 이 시기 이진선은 생각이나 했을까. 이들은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수령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만 혈안이 된 '인민의 적'이었음을. 그리고 이때로부터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수백만의 인민을 굶겨 죽이게 될 줄을.

1970년 이진선의 일기는 김정일의 등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김일성이 사로청 6차 대회에서 "대를 이어"라는 표현을 사용한데 대해 의심스러워 한다. "세대를 이어"가 아니라 왜 하필 "대를 이어"라고 했을까. 이진선은 "꼭 뭐라 꼬집어 밝힐 수는 없으나 분명 무엇인가 엄청난 살매가 다가오는 느낌이다"라고 기록했다. "이 불안이 제발 근거 없는 것이기를" 바랬지만, 결국 북한은 그가 생각했던 '최악'의 나라로 점점 변해간다.

남북회담 취재를 위해 남한에 갔다 온 이진선은 며칠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경제적 격차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이야기하는 남쪽 기자들의 태도가 그에게는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부러웠던 점은 그 거리에 평양의 고요와는 다른 생동감이 넘실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 명동거리에 쏘다니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미제의 저질문화에 오염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인가 해보려는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도심 곳곳에서 본 젊은이들의 얼굴은 패기가 넘쳐났다." (1972년 11월 30일 일기중, 259페이지)

그러면서 이진선은 "난 기자로서 공화국의 권력을 감시하고 있는가"하는 회의에 빠진다. 솔직히 이 부분부터는 이진선이 참으로 한심해 보인다. 줄곧 고민만을 계속하고 매번 '당을 믿자'고 스스로 합리화했던 이진선은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냉소와 좌절에 빠진다. 1948년 2월 8일 일기에 썼던 "과연 침묵하는 것이 오늘 진정한 혁명가로서 최선의 길일까?"하는 질문은 그가 평생토록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1973년 10월 6일 일기에도 그는 "무엇보다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운 것은 그럼에도 내가 침묵하고 있다는 비굴함이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

"김정일 동지의 생일. 나의 50대를 온통 잿빛으로 만든 인물. 오늘 그가 수령의 후계자로 공식 선언됐다. 그가 과연 어떻게 후계자가 되는가를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다짐으로 지난 몇 년동안 무시로 엄습해왔던 자살의 충동을 억눌러오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부질 없는 일이었다."

1980년 2월 16일 일기를 이진선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기 이진선은 직장에서 정년퇴임한다. 그리고 그의 냉소와 좌절은 더해간다.

"조선로동당의 지도자들은 1980년대 오늘 더 이상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다. 명백한 왕정복고가 사회주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언감생심 자신의 아들에게 인민의 공화국을 물려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80년 10월 14일의 일기중, 314페이지)

"오늘은 모란봉 경기장을 확장한 김일성 경기장에서 '김일성주석께 전체 인민의 이름으로 드리는 충성의 편지' 증정식이 열렸다. 사회주의공화국의 주석인가, 로마제국의 황제인가. 아니면, 내가 더 이상 사회주의자가 아니어야 할까." (82년 4월 16일의 일기중, 320페이지)

"<로동신문>, <로동청년>, <조선인민군>이 당창건 50돌을 맞아 공동사설을 실었다. 김정일 동지의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당이다' 논문이 '력사적인 혁명적 명절을 맞아 발표한 고전적 문헌'이자 '의의 있는 사변'이란다. 옳은 말이다. 조선로동당이 인민의 당이 아님을 고백한 '고전'이자 '사변' 아닌가." (95년 10월 10일의 일기중, 377페이지)

"정녕 언제일까. 역사 앞에서, 민족 앞에서 당과 김정일 동지가 사회주의자답게 겸허한 자세를 보일 그날은." (97년 7월 9일의 일기중, 383페이지)

이때서야 이진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더 이상 사회주의 나라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가 꿈꿔왔던 '아름다운 집'이 북녘에서는 세워지지 않았음을 그때야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깨달음 치고는 너무 늦었고, 고작 '작은 해방구'라 스스로 부르는 자기 집에서 여자 친구와 어울려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하여!"를 외치며 술잔을 부딪치는 신세가 된다. 혁명에 대한 꿈과 열정이 가로막히고 사라져 버린 늙은 혁명가의 쓸쓸한 초상이라고나 할까.

안타깝게 이진선은 무너져 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름다운 집'의 희망을 남쪽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만일 박헌영 선생이 공화국을 맡았다면 우리 현대사는 어떻게 됐을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결국 자살을 결심한다. "거대한 범종을 향해 날아들어 자신의 머리를 부딪치고 부딪쳐 이윽고 종을 울리게 한 까치처럼" 자신의 죽음이 당에 경종(警鐘)이 되길 바라면서.

아름다운 집을 무너뜨린 자

이진선은 죽으면서 두통의 유서를 남긴다. 하나는 '김정일 동지'에게, 또 하나는 '아직 오지 않은 동지'에게.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진선은 "(김정일) 동지가 바로 주체사상의 근본원칙에 더 없이 충실할 것을 온 몸으로 촉구"한다. "인민에 대한 당의 지도는 분명 중요"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미 그 도를 넘어 섰으며 "당이 수령을 위해 있다는 반(反)사회주의" 나라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김정일이 "진정한 인민의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충고한다.

마지막 순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긴 유서이겠지만 이진선은 이렇게 끝까지 '지독히 순진하게' 최후를 마친다. 이미 30년동안 스스로 수령절대주의를 구축해온 김정일이 어떻게 스스로 그 권력을 내놓고 하루 아침에 인민의 편이 된단 말인가.

인생 후렴에 이진선은 남한에서 혁명이 승리하고 그 힘으로 북한도 변화하길 바라는 듯한 일기를 남긴다. 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의 답답함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북한 혁명은 북한 인민들이 주인이 되어 해야 할 일 아닌가. 그곳에서 당을 상대로 투쟁을 하기 어려우면 외부에 북한의 실정을 알리는 일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을까. 남한이 북한혁명의 근거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한 혁명에 집중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북한혁명에 영향을 주겠다는 것만큼 대책없고 비주체적인 생각이 어디있는가. 혁명의 동지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혁명을 후퇴시키고 나아가 인민의 적이 된다면, 당연히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 진정한 혁명가의 자세이다. 그러면서도 이진선은 황장엽씨가 남쪽으로 간 것에 대해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황장엽은 당연히 여기서 노선투쟁을 벌이고 순교의 길을 택해야 했다"면서 "내부로부터의 개혁 가능성이 고갈되고 있다"고 탄식한다. 스스로 그것이 불가능하고 자신도 어찌 할 수 없으면서 '순교의 길'과 '내부로 부터의 개혁 가능성 고갈'을 이야기하는 이중성은 또 무엇일까. 이렇게 보면 이진선은 '지독히 순진한' 혁명가가 아니라 자신만의 테두리를 그려놓고 혁명을 생각하는 "지독히 자위(自慰)적인" 몽상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름다운 집을 덮으며 우리는 아름다운 집을 생각한다. 역사상 얼마나 숱한 혁명가들이 이 아름다운 집을 꿈꾸며 이것을 짓기 위해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불살랐을까. 저 멀리는 노예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일어섰던 봉기의 지도자로부터, 봉건영주에 저항하고 식민주의자에 대항했던 혁명가, 그리고 만민평등의 사회주의를 '가슴으로' 진정 믿었던 사람들까지…. 이상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행동 아닐까.

이상의 옳고 그름은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한다. 그릇된 이상을 갖고 있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이상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도 인류의 역사에는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악랄한' 사람들은 이렇게 순진한 사람들의 순수한 이상을 사욕을 위해 악용한다. 이런 자는, 혁명을 반대하고 탄압하는 자보다 더 악랄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순수한 이상의 깃발을 짓밟은 자 누구인가. 이진선의 일기는 그 실체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