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마찬가지로 남북은 회담을 정리하면서 공동보도문 형식으로 합의사항을 발표하였다. 6개항의 합의사항 중엔 경제협력과 관련된 내용이 9개의 세부항목으로 나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주요 언론들은 '풍성한 말 잔치,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고 회담 결과를 평가했다. 이번 장관급회담을 계기로 그간의 남북관계를 살펴보고 북한의 의도를 파악해보자.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남북관계 정체를 불러왔나?

먼저 5차 장관급회담이 지난 3월에 어떻게 해서 취소되었고 이번에 다시 재개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북 간, 엄밀하게 말해 남북 당국간의 대화는 지난 6개월 동안 교착과 정돈(停頓)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무엇이 남북관계를 6개월 간의 블랙홀에 빠지게 했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것을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대한 북한의 반발 표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외형만을 놓고 보면, 혹은 단순 도식으로 정세를 판단하면 그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지난 1월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북한문제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지 못한 채 준비의 과정에 있다가 3월에 접어들면서 점차 북한정권과 핵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3월 8일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파월 미 국무장관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서 감시와 검증이 빠졌다"면서 "북한은 독재국가이고 실패한 사회", "김정일은 독재자"라고 평가했다. 또 부시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정일에 대해 회의하고 있으며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하건 '명확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시행정부 출범이후 대미 비난 방송을 자제하던 (1월 - 2건, 2월 - 5건) 북한은, 콜린 파월과 부시의 발언이후인 3월 14일에만 44건, 15일에는 45건 등 극렬하게 미국을 비난했다. 내용도 "식인종의 무리", "전쟁광신자" "천백배의 불로 다스리는 것이 우리의 기질" 등 원색적 용어를 사용하였다. 5차 장관급회담이 있기로 한 3월 15일 당일 아침에 불참을 통보하고 곧바로 이러한 방송들을 내보낸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번에 우리가 불참을 선언한 것은 미국 때문이다"라는 메시지임이 분명하다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 북미관계에 그리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Keys 지면을 통해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듯,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되었던 지난해 초부터 이미 북한의 대외전략은 중국·러시아와의 동맹관계 복원으로 반미전선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생존권을 보장받으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표1>
고로 미국을 대화테이블로 끌어오기 위해 남북관계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은 단순한 발상이며, 미국 역시 이것으로 태도를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 또한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정책'으로 수립되지 않은 상태이고 단순한 '입장'과 '견해'로 표출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남북관계에 제동을 거는 것은 그리 이치에 맞는 행동이 아니다. 대화상대인 남한정부에 대단한 결례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지난해 10월경, 3차 장관급회담을 전후한 시점부터 북한은 제반 남북관계를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2000년 9월과 10월에 100명씩 명단을 교환하기로 했던 이산가족 생사확인과 11월 중 각각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키로 했던 서신교환은 2001년 2월과 3월에야 회답을 주었다. 당초 12월 5일부터 7일까지로 예정된 3차 이산가족 교환방문은 시간을 끌다 2001년 2월말에 이루어졌고,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금강산에서 열기로 한 3차 적십자회담 역시 일방적으로 연기하였다. 4차 장관급 회담은 합의된 일정보다 2주일 늦춰 이루어졌으며, 지난해 11월 중 갖기로 했던 2차 남북 국방장관급회담은 여태껏 묵묵부답이다.

결국 북한이 노리는 것은 다각적이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갈 수 있는 남북관계의 흐름을 그 시점에서 어느 정도 조정하고, 그간의 성과를 러시아와 중국에 보여주면서 북·중·러 트라이앵글을 형성할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과연 남북관계를 정돈한 후 김정일은 중국과 러시아로 발빠른 행보를 계속했고 양측으로부터 일정한 신임과 성과를 얻어낸 듯 하다. 또한 남북관계 교착의 탓을 미국으로 돌리면서 남한 내 반미여론을 형성하고, 그 기간동안 민간교류로 축을 돌리면서 남한 내 여론을 흔들어 놓고, 남한당국은 당국간 대화에 더욱 몸 달게 하는 여러 가지 부수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이것 역시 8·15 평양행사와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을 둘러싼 이른바 '남남갈등', 김대중 대통령의 잇따른 김정일 서울답방 촉구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북관계의 문제는 아니지만 남북외무장관회담이 예상되었던 지난 7월 제8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회의에도 북한은 백남순 외무상이 갑작스레 불참을 통보하여 23개 회원국 중 유일하게 외무장관이 불참한 나라가 되었다. 금강산 관광료와 관련된 현대와의 협상에도,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결국 지난 3월 북한의 남북장관급 회담 취소는, 늘 그래왔듯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고 가려는 의도이며, 지금까지의 진행 결과는 여러 측면에서 북한의 이러한 의도를 잘 충족시켜주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남북관계를 통해 북한이 얻으려고 하는 것

그럼 이제 그동안 진행되었던 당국간 회담을 정리해보자. 가장 높은 수준의 당국간 회담이라 할 수 있는 정상회담은 작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이후 1년 이상 오리무중 상태에 있다. 남한으로서는 한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번 장관급회담에서 김정일 답방문제에 대해 북측 대표는 "그것은 우리 권한이 아니다"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어찌 김정일의 행보에 대해 그들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것도 김정일의 선택에 의해 페이스 조절이 될 것이다.

정상회담 다음 단계의 당국간 회담은 장관급회담이다. 지금까지 남측은 통일부장관을 수석대표로 하여 참석했고 북측은 내각책임참사가 단장으로 참석해 왔다. 참석하는 관료의 격으로 본다면 남북문제와 관련된 큰 틀을 합의하는 회의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합의된 사항은 남북경협실무접촉, 남북군사실무회담, 남북전력실무협의회, 적십자 회담 등 각종 실무협의회를 통해 구체화되며 한차례 국방장관회담도 열린바 있다. 그간 장관급회담을 통해 합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2>

이상의 합의사항을 간단히 살펴보아도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합의가 계속 반복된다는 점이다. 경의선 단절 구간 연결, 임진강 수해방지사업, 경협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은 매번 합의되었던 사항이다. 이번 5차 회담은 6개월의 공백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4차 회담의 판박이 밖에 되지 않았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셈이 된 것이다.

그럼 무엇이 이행되었고 무엇이 이행되지 않았는지 살펴보자. 이산가족 상봉이 3차에 걸쳐 이루어졌고, 생사확인과 서신교환도 한차례 있었다. 대북 식량지원은 즉각 50만 톤이 화물선에 실렸고, 장관급회담 합의사항은 아니지만 비전향 장기수 송환도 곧 이루어졌다. 백두산 한라산 교차관광은 남한 사람들의 백두산 행만 이행되고, 북한 사람들의 한라산 행은 이제 잊혀진 상태다. 2001년 상반기에 파견한다던 경제시찰단도 아직 소식이 없다.

이러한 이행사항을 분석해보면 남에서 북으로 가는 것은 있는데 북에서 남으로 오는 것은 드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자든 사람이든 말이다. 물자가 북으로만 가는 것은 얼마든지 상관없으나 실질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려면 북쪽 사람들이 남한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할텐데 북측은 어찌된 영문이지 이러한 인적 교류와 관련된 부분은 대부분 회피하고 있다. 북은 이산가족 상봉 같은 이벤트성 행사는 남쪽의 분위기가 식을 만하면 특정한 인원을 선발해 와 보여주고 - 물론 어떠한 형태로든 이산가족 상봉은 지속되어야 하지만 -, 지속적인 상봉을 이룰 수 있는 면회소 설치 등의 합의는 꺼리고 있다. 면회소 설치는 지난해 장기수 송환의 대가로 논의하기로 했던 사안이지만, 북한은 계속해 장기수 추가 송환만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합의된 사항도 어렵지 않게 그 결과를 예측해 볼 수 있다. 태권도 시범단 교환 같은 것은 화려하게 이행될 것이다. 금강산 육로 관광도 여러 가지 난제가 있긴 하지만 북이 조금 내부정비를 하면 폭죽을 터트리며 이행될 수 있는 사안이다. 민간선박 영해통과나 동해어장 일부 공동이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의선 연결, 가스관 연결, TSR과의 연결, 경협제도화 등은 계속해서 무지개 빛 꿈만 부풀리면서 쳇바퀴를 돌 게 할 것이 분명하다. 개성공단도 남한정부를 잡아두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는 추진하는 모양새를 취할 것이지만 체제안정에 위협될 단계가 되면 (물론 그 지경까지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다) 단호히 계획을 취소할 것이 분명하다.

정리해 보자면 지금껏 북한은 잡았다 놓았다 하는 전술을 통해 원점을 빙빙 돌며 남한 정부를 최대한 감질(疳疾)나게 하고, 민간교류는 남에서 북으로만 열어놓은 상태에서 남쪽의 우호세력을 들뜨게 하고 여론을 흔들어 놓으며, 더불어 각종 실리는 실리대로 챙기는 노련한 대남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결국 김정일이 필요로 하는 것은 통일이나 평화가 아니라 체제안정을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남한 정부도 그간의 성과와 문제점을 냉정하게 분석해보고, 북한이 진정으로 바라고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여 주도적인 협상 전략, 새로운 대북·대외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대남사업 전문가들의 손바닥 위에서 농락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누차 말했지만 김정일의 변화가능성은 제로(0)이며, 그는 이미 자신의 구상을 완성단계에 올려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