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어느 인터뷰에서 ‘카이사르(시이저)가 우리 시대에 태어났다면 뛰어난 카피라이터(Copywriter)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부하들에게 했던 연설의 마지막 구절인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이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짧은 승전보(勝戰譜)는 2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심심지
않게 인용되는 너무나 유명한 표현입니다. 특히 심복 브루투스의 칼에 죽는 순간에도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카피라이터적인 기질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북한의 카이사르(시이저 이후 카이사르는 ‘황제’를 일컫는 별칭이 되었음)인 김정일씨가 자본주의 국가에 태어났더라면
그 역시 대단한 카피라이터가 됐을 법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정일 씨는 자신이 사랑하는 인민들에겐 왠지 방송을 통해
육성을 들려 준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 92년 조선인민군 창설 기념식장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있으라”라는
한 마디를 던졌는데,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카피라이터적 자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 축복 받은
우리 남한 인민들은 김정일 씨의 목소리와 행동 하나 하나를 북한 인민들보다 훨씬 많이, 밤을 새워가며 생방송으로 지켜봤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눈물이 흘러나오고 감동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그분’을 말입니다. 그리고 역시 그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톡톡 튀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김정일 씨를 원 없이 만나본 올 한해를 마감하며
‘카피라이터 김정일 씨’의 2000년 유행어를 골라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로 지난 8월 언론인
방북단 면담 과정에 나온 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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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김정일씨의 말, 말, 말 ... "BEST 5"
1. 통일은 내 맘먹은 때 한다!
통일은 언제 될 것 같으냐는 남한 언론인들의 질문에 김정일 씨는 ‘자기가 맘먹으면 된다’고 호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랫것들이 제대로 일을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투정을 부렸습니다. 세상 거칠 것 없이 자란 김정일 씨의 호탕하고 막 나가는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Keys 선정 2000년 최고의 명언입니다. 남북을 통틀어 '오직' 김정일 씨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통일?! 그거 내가 싫으니까 안 되는거야." 숨겨둔 마음은 이 말일 것입니다.
2. NHK는 광고가 없어서 좋다.
김정일 씨는 슈퍼맨입니다. 북한에 아직도 TV 없는 여염집이 많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껏해야 인민들은 한 두
채널만을 볼 수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그는 무슨 신통한 재주가 있는지 어젯밤에 KBS를 봤다느니 CNN을
보니까 어쩌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NHK는 광고가 없어서 좋고 중국 CCTV와 러시아 TV는 관영인지 아닌지
혼란스럽다고 친절하게 평가해 주기도 했습니다. 남한 신문도 대북기사는 빠짐없이 다 본다고 합니다. 인민의 눈과 귀는
틀어막고 자신은 모든 것을 다 누린다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김정일 씨에게는 그게 분명 '자랑'으로
느껴질 겁니다. 이런 김정일 씨를 두고 '개방적'이니 '합리적'이니 평가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공부를 다시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3. 시드니에 가서 배우 노릇 하는 것보다는 서울에 먼저 가야 한다
남북정상을 시드니 올림픽에 초청할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방북단의 질문에 김정일 씨는 "나는 배우노릇 하기
싫다"는 표현으로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늘상 주인공 노릇만 했던 사람이, 다른 나라
정상들이 수두룩하게 모인 이상한 잔치에 멋쩍게 찾아가 그 틈에서 엑스트라 노릇 할 리가 있겠습니까? 미사일 날아다니는
카드섹션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또 모를까.
4. 북이나 남이나 기름을 사다 쓰는데 돌아갈 필요 있느냐
서울과 평양을 오고 가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로 가게 되면 휴전선 때문에 직선거리로 오가질 못하고
서해상을 빙 돌아 다녀야만 했습니다. 직항로를 뚫으면 어떻겠냐는 방북단의 질문에 김정일 씨는 "휘발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서해상을 빙 돌아갈 필요가 있냐"며 직항로를 뚫을 것을 교시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때는 이미자, 김연자 이런 사람들을 데려오랍니다. 남한의 기름 걱정까지 해주시는 김정일 씨의 하해와 같은 마음은
감개무량할 따름이지만, 북한에 전해지는 전 세계의 구호물자나 떼먹지 말고 인민들에게 잘 나눠줬으면 좋겠습니다.
5. 역시 포도주는 프랑스 산이 최곱디다.
인민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떨고 있다는데, 우리 김정일씨는 이를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국 말은 발목이
약해 내가 타면 다리가 부러질 것이다, 러시아 올로브 종자가 내겐 좋다, 한국 영화 본 소감을 광케이블을 통해 보내주겠다
하는 말들을 자랑스레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방북단과 함께 당나귀 고기를 뜯으면서, 프랑스산 포도주 맛을 칭찬했습니다.
30가지나 되는 막걸리 중에 가장 맛좋은 포천 막걸리를 가려낼 정도의 애주가라는 김정일씨.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데 술 좀 어지간히 드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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