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Review: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내가 사는 동네에 정신병원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니까 TV의 고발성 다큐멘터리에 나올 만한 그런 정신병원으로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런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마을사람들 몇몇은 알고 있다. 그러면 우린, 그들은 환자니까 병원에 맞는 규율로 다스려지고 또 우리와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위해 다른 방법을 취해 줄 것인가.

상상하기에 너무 거리감이 있다면, 이번에는 우리 옆집에 매맞는 아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자. 남의 가정사니까 라고 덮어 둘 것인가, 아니면 경찰이나 '여성의 전화'에 신고 할 것인가?

영화 속으로 들어가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s over the cuckoo's nest-밀로스 포만 감독, 1975년작)’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무대는 정신병원이다. 정신병원이라면 영화에서는 아주 좋은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처음 만나는 자유’류의 성장기 영화나, ‘킹덤’과 같은 공포영화에서는 물론이고 인권영화에도 한몫을 한다. 그 만큼 ‘정신병원’이란 곳이 폐쇄성이 강하면서 그 속에는 성장하지 못하는, 공포스러운 그리고 반인권적인 어떤 ‘기호’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하여간, 맥 머피라는 죄수는 감옥에서 탈출할 목적으로 정신병자로 가장하여 병원으로 이송된다. 너무나 자유분방한 맥 머피와 그 반대의 환경에서 살아온 환자들 그리고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본분인 간호사들, 이 세 꼭지점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의 사건들이 이 영화 속에서 전개된다.

너무나 침착하고 능숙한 솜씨를 지닌 간호사와 깔끔한 종업원 차림을 한 도우미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흰색 벽의 병동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게임에 열중인 환자들이 있다. 정신병원 환자의 묘사가 그렇듯이, 멍한 표정과 비정상적으로 웃는 모습의 환자들이다. 이런 것들이 처음 병원에 들어온 맥과 우리가 보게되는 병원의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맥은 이 평화스러운 모습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정신치료 요법’의 하나로 행해지는 토론시간에는 말로 표현 못할 중압감과 환자들의 의기소침한 모습들이 있다. 반씨니라는 중증환자가 항상 중얼거리듯이 ‘모두가 엉터리’이고 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인디언과 항상 말을 더듬는 빌리 등, 여러 환자들은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사고능력 때문에 병원에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병원에 맡기고 있다. 그들의 자주성마저도. 그러나 이제는 누구를 위한 병원인가를 논하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렸다. 그들의 약점을 극복해 주기에 이 병원의 존재는 너무나 커져서 이제는 종속관계가 분명해져 버린 것이다.

간호사들은,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로 짜여졌다고 알려진 일과계획표를 바꾸지 않으려고 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그 계획표에 따라 환자들은,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약을 매일 먹어야하고 또 그 계획표에 나와 있는 대로 운동장을 서성거려야 한다.

자신감이 없어 여자에게 프로포즈 한번 못해본 말더듬이 빌리는, 맥이 마련한 난장판 쫑파티를 통해 데이트에 성공하고, 자신감 회복에도 성공은 하지만, 간호사 래취드의 억압구조에 말려들어 자살하고 만다. 이것이 이 병원체제의 구도였던 것이다.

또 맥이 추장이라고 부르는 인디언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항상 무표정한 표정, 공중에 고정된 시선으로 청소만 하고 있다. 많은 미국영화에서 현명한 존재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디언은, 이 병원에서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주적인 의지가 필요 없는 곳이므로 벙어리로 귀머거리로 연기하며 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맥은 이상한 치료를 받고 산송장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추장'은, 맥이 더 이상 병원에서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맥의 물리적인 생명을 끊어버린다. 맥은 이미 병원의 치료로 인해 사회적인 생명이 없어진 상태였다.

추장은 맥이 허풍떨며 이야기한 탈출방법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과연 '추장'답게, 맥마저도 들 수 없었던 병원체제와도 같은 거대한 대리석 세면대를 번쩍 들어 올려 아무도 열어본 적이 없는 정신병원의 벽을 향해 내던진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여기에 나오는 간호사 래취드는, 환자들을 'gentlemen'이라고 침착하고 친절하게 부르는 대신 그들의 자주성을 묶어두고 '정신병원'이라는 권위와 체제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 모습이 누구와 많이 닮아 있다.

이 점에서 북한 인민과 북한 체제와 북한 인민을 내몰고 있는 김정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주적인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병원'의 환자들과 같이 자주성을 빼앗기고, 체제와 수령의 허울에 묶여 있는 북한 인민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살까지 하도록 빌리를 윽박지른 그 대상은, 땅에 떨어져 밟힐 수도, 먼지가 묻을 수도 있는 간호사의 흰색 캡처럼, 별 것 아닌 계획표와 체제일 수도,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권위일 수도 있다.

예전에 열심히 학생운동을 하던 한 친구가 생각난다. 술자리에서 그 친구는 보통의 학생운동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북한 인민들이 진정으로 그들의 민주화를 원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역설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수십 년간 자주적인 의지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체제에 대해 논하라고 하는 것은, 영화에서처럼 다른 생활은 해 본적도 없는 정신병동의 환자들에게 자신들의 일과표를 바꾸기 위해 '야구중계'를 시청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투표하도록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결국 과반수를 넘기지만 래취드가 만든 투표해석 방식으로 그 결과를 묵살해 버린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야구시합을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한번 봤으면 싶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한번도 자주적인 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없지만, 그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본능적인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타고났으므로. 그들의 자주성은 단지 체제의 억압에 눌려 잠시 시들해 버린 것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자유의지, 자주적인 행동은, 정신병원 의사가 평생에 한 번 밖에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연어보다 더 큰 연어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