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2000년 10월 북한의 장마당 - 김정일도 어찌하지 못하는 시장경제
지난 11월 18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사무실로 한편의 비디오 테이프가 배달되었다. 일본의 북한민주화운동 단체인 RENK(REscue North Korean people ; 구출하자 북조선 민중! 긴급행동 네트워크)에서 보내온 이 테이프는 지난 98년 9월 북한의 장마당과 꽃제비들의 모습을 비밀리에 촬영하여 KBS 등을 통해 방영함으로써 화제를 모았던 안철(가명) 씨가 올해 10월 재잠입, 촬영한 내용이었다. RENK와 NKnet은 총 60여분에 이르는 이 테잎을 20분 정도로 편집하여 공개하였다.


비밀리에 촬영되었다는 점에서, 흔들리는 화면은 시작부터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을 더해주는 것은 장마당 곳곳에 진을 치고 앉아있는 사회안전원들의 모습. 98년의 비디오 내용과 비교해 찾을 수 있는 첫 번째 특징이다. 안철 씨는 RENK 측과의 인터뷰에서 “재작년에 공개된 비디오 때문이지, 다른 범죄자를 색출하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유를 설명했는데, 아무튼 공안원의 숫자는 눈에 띄게 늘었으며 그만큼 장마당에 대한 통제가 심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징은 장마당에 나와있는 상품들의 종류가 부쩍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에서 생산한 듯한 물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과거와 달리,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옷과 생필품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디즈니사의 캐릭터가 커다랗게 그려진 셔츠가 놓여있는 등 상품의 색깔이나 디자인도 다양해 졌다. 일단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부터 예전보다 다양해진 것 같고,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니던 아이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이번 화면에서는 엄지발가락이 삐져 나오긴 했으나 모두가 신발 비슷한 것이나마 신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꽃제비(거지)의 숫자도 상당히 줄었다. 경제사정이 호전되었다는 증거인지 꽃제비에 대한 단속이 심해진 때문인지는 속단할 수 없지만, 98년 화면에서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두 손을 모은 깡마른 꽃제비의 모습에 가슴 아파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조금 내쉬어도 좋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주워먹는 꽃제비들이 눈에 띈다. 주웠는지 훔쳤는지 모를 음식을 갉아먹으면서 카메라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한 어린이의 모습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한다.

비밀카메라를 들고 장마당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담아온 2000년 10월 북한 어느 도시의 장마당 풍경. 혹자는 '이제 죽을 사람은 다 죽었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너무도 잔인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북한 당국이 '고난의 행군은 끝났다'고 공언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죽을 사람도 없다'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읽을 수 있는 희망 하나는 북한에 이러한 자유시장이 살아 있는 것. 지난 4월부터 김정일 정권은 상당수의 장마당을 폐쇄하고 장마당 출입연령을 55세 이상으로 제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잘라내지 못하는 것은 장마당을 전면 철폐시킬 경우 그나마 얕은 숨을 쉬고 있는 북한 경제가 결정적으로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판단과 함께, 인민들의 보이지 않는 저항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미 일반화 되어버린 시장경제를 김정일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철 씨가 담아온 장마당 화면에 덧붙이는 소감 한마디. 우리는 언제까지 북한 인민들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목숨을 걸고' 찍어와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도 중국과 북녘 땅 어디에서 북한의 민주주의와 인권실현을 위해 싸우며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안철 씨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