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ark: 일제시대 최고의 문장가 이태준의 통한의 가족사
『월간중앙』 11월 호에는 1998년 7월 탈북한 뒤 중국을 거쳐 99년 11월말 한국에 온 북한의 여류시인 최진이(41)가 구체적으로 증언한 월북작가 이태준의 가족사가 나와 있다. 북한의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 작가로 활동하다 1998년 3월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추방당한 최진이는 평양을 떠나기 직전 동료 작가가 ‘작별선물’로 빌려준 한 ‘비밀일기’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일기는 이태준의 막내딸 이소현(李小賢·1940년 생)과 맏딸 이소명(李小明·1931년 생)에 의해 쓰여진 것이었다.

일기의 첫 장 아랫부분에서는 붉게 밑줄이 그어진 색연필 글씨로 “누구에게 보이지 말 것! 큰 화근이 될 수 있음!” 이라고 쓰여 있었고, 두 번째 장 첫머리에는 “진실하다면 가장 진실한 사람에게, 강하다면 가장 의지 강한 사람에게, 선량하다면 이 세상 가장 선량한 사람에게 이 글을 보여드리고 싶다” 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일반인들이라면 아주 나이 많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태준을 모르지만 최진이는 대학시절 조선문학사 강의 때 소위 ‘반동작가’ 이태준에 관해 들었기 때문에 그 일기의 중요성을 대번에 파악하고 밤을 새워서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이태준은 월북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저작들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금서로 되었고 중고등학교에서도 그에 관해 가르치지 않아서 일반인들 중에는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며 ‘한국 단편의 완성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등의 칭송을 들어왔고 또 듣고 있는 사람이다.

1927년 7월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당선돼 문단에 등단한 이태준은 소설·시·동화·수필·평론 등 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해 단편소설집 11권, 『제2의 운명』을 포함해 13편의 장편 등 총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33년 일제 탄압으로 카프(KAPF) 중심의 경향문학이 퇴조하자 이태준은 순수문학을 표방하면서 ‘9인회’(九人會)를 결성, 순수문학을 이끌었다. 구인회는 이태준 말고도 정지용·김기림·박태원·이상·이효석·김유정 등 기라성 같은 멤버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태준은 1939년에는 『문장』지를 창간해 편집자 겸 주간으로 활약했고, ‘반영으로서의 문학’보다 ‘기교로서의 문학’을 추구했다. 『문장』지 창간호부터 연재를 시작해 194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문장작법의 영원한 고전으로 꼽혔다. 그런 그가 1946년 갑자기 월북하면서 놀라운 사상적 변모를 시도해 문단을 놀라게 했다. 1947년 쓴 『쏘련기행』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월북 후 이태준은 한동안 북한 문단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김일성대 교수인 정률은 그를 들어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렀고, 『로동신문』주필 기석복은 그를 위해 조·소문화협회 주최 이태준 연구발표회를 수 차례 주선해 주기도 했다.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초청으로 중국 대륙을 한 달여간 방문, 이듬해 『위대한 새 중국』이라는 중국 기행문을 발간(국립출판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문학작품들은 종전 이후 남로당계의 몰락과 함께 갑자기 북한 문단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태준은 1957년 평양 추방 후 해주 황해도일보사 인쇄공으로 배치되어 일하다가 64년부터 중앙당 101호 창작실 ‘비밀작가’로 일했고, 67년 평양으로 귀경했으나 74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재추방되어 거기서 살다가 아내가 죽은 직후 행방불명되었다고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이태준의 숙청 후 만년(晩年) 행적들뿐만 아니라 두차례에 걸친 ‘평양 추방’으로 인해 벌어졌던 이태준가의 파란만장한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태준은 1차 탄압 때 해주로 내려온 직후에도 사상투쟁회의를 거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그는 도당 지도원으로부터 “남조선에서 간첩 임무를 받고 온 사실을 자기 비판 때 실토하라”는 추궁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태준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 없다”고 반박한다. 지도원은 이것이 “조직의 지시”라며 “선생이 우기면 범죄가 더 커질 것”이라고 위협을 가한다. 이태준은 이때 “만약 간첩 임무로 낙착된다면 온 가족이 멸살(滅殺)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번민한다.

당초 이태준이 사상투쟁 무대에 오른 것은 그가 정치성 없는 글을 쓴다는 이유였다. 김일성 형상소설을 안 쓴다는 것이었다. 과제와 함께 시간도 줬으나 이태준은 번번이 공탕을 친다. 그런 이태준이 하루는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는다.

“나는 작가적 양심과 타협하지 못하겠다. 김일성 소설은 정말 못쓴다. 김일성과 체험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그의 글을 쓴다는 말이냐? 작가가 체험 안하고 쓴 글은 글이 아니다.”

이 일기를 쓴 이태준의 막내딸 소현은, 이태준이 67년 평양으로 복귀한 이후 대학을 나오고 외교부에서 일하는 대학 동창생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만 이내 어려움을 맞게 된다. 74년에 또 사상투쟁회의가 열리고 이태준이 다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그 사유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재차 평양에서 추방된다. 이번엔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추방되었다. 이태준의 막내딸 이소현 부부도 지방으로 다시 추방된다. 소현의 남편은 외교부에서 해임되었다. 소현은 남편과 평양에서 평안북도로 추방되어 농장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소현과 남편은 그곳에서도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마주앉아 늦게까지 공부했다. 그의 집 서재에는 외국어로 된 책이 넘쳐 났다. 그들에게 재산은 오로지 책뿐이다. 동네사람들은 그들 집을 가리켜 ‘대학생집’이라고 불렀다. 남편은 텃밭에 남새를 심어 가꾼다. 부지런히 거름주고 김을 매준다. 그의 텃밭은 그 종 수나 관리에서 동네에서 으뜸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텃밭 옆을 오갈 때마다 “역시 대학생이 다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2년 후 소현의 남편은 더 먼 곳으로 혁명화를 간다. 이때 맏시누이에게서 소현 앞으로 편지가 날아온다. 이혼해 달라는 것이다. 이혼을 안 하면 자기는 군관인 남편과도 갈라져야 하며 자기집 세 아들은 어머니 없는 아들이 된다고 했다. 설복과 강박·위협·애원이 이어졌다. 소현은 결국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신청서를 낸다. 남편과 함께 재판장에 불려가 이혼 동의에 꺼림없이 "예" 하고 대답한다. 그는 “아들(임당)은 어떻게 하겠는가”는 재판장의 질문에도 “남편에게 주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들 또한 어머니와 있으면 전망이 꽉 막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막내딸 소현은 두 돌 갓 지난 아들과 함께 남편을 빼앗기다시피 하며 이혼을 하게 된다. 소현은 몇 달 후 더 깊은 산골마을인 임산사업소로 실려간다. 그곳에는 소현의 둘째 오빠 유진의 가족이 이미 들어와 있다. 유진은 그곳에서 작업반장, 아내는 유치원 교양원을 맡고 있었다.

소현은 노동자합숙소에서 합숙생활을 했다. 그는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하는 오빠네가 부러웠다. 유치원에서 노는 조카를 볼 때마다 아들 임당의 생각으로 몸서리친다. 남편으로부터 일곱 번째 편지가 온다. 또 다시 6개월 짜리 혁명화 간다고 한다. 임당이는 엄마 찾느라 밤마다 잠을 못 이룬다고 마감에 썼다.

그 뒤로 얼마 후 소현은 오랫만에 편지 한통을 받았는데 남편이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혈압이 쫙 오르며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이혼 후 불면증으로 잠을 못 이루었지만 그런 대로 참고 일을 나가 땅을 파왔지만, 이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오빠가 작업 인원을 점검하다 소현이가 안보이자 합숙소로 찾아온다. 소현의 양쪽 눈귀에 투명한 눈물방울이 가랑가랑 맺혀 있다. 오빠는 불덩이인 누이동생의 이마를 짚어 보고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준다.

“소현아, 우린 지금 혁명화 기간이야, 아파도 남들처럼 누워 있으면 안돼.”

그런 소현이가 임산사업소를 비우고 40일 동안 건설노력동원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돌아와 보니 오빠 가족은 사업소를 떠나고 없었다. 소현은 그 뒤로 남포시 건설을 지원, 무려 8년 동안이나 건설지원 돌격대 대원으로 활동한다. 소현은 북한이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초 ‘서해갑문’ 건설과 함께 벌였던 남포시 건설사업에 돌격대로 선발돼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자랑하는 서해갑문은 1986년 완공되고 소현이 그 건설에 참가한 남포항은 1987년 개항한다. 소현은 8년간의 건설돌격대 생활을 마치고 다시 임산사업소로 돌아와 산골의 한 농민과 재혼해서 평범한 농민의 아내로 살아간다.

이태준의 맏딸인 소명 부부는 이태준이 첫 번째 사상투쟁 무대에 서 있을 당시 소련 ○○아카데미야 연구원에 유학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아버지 문제로 유학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소명의 남편은 고매한 인격과 실력을 인정받아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임명받는다. 그는 타고난 교육자로 전대학 교원들의 총애를 받는 수재이다. 소명의 남편은 숙청 후 추방당한 장인을 끝까지 챙긴다.

소명의 남편은 완벽한 실력과 군중의 두터운 신망, 고상한 인격으로 장인이 모진 풍파를 겪는 속에서도 대학교원으로 건재했다. 그러나 이태준이 두 번째로 혁명화 내려간 뒤 보위부는 그에게 아내인 소명과의 이혼을 강제한다. 그는 이혼 후 6개월만에 화병과 고혈압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이태준의 둘째 딸 소남은 대학 졸업 후 평안북도 구성시의 한 담수양어장에 양어기사로 배치돼 간다. 이태준이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있을 때 소남은 한 남성과 결혼하지만 아버지가 반동작가로 다시 낙인찍히자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6년 동안 폐병으로 죽어 가는 남편을 살려놓고 할 일 다했는데 왜 쫓겨난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남편은 매일같이 소남을 구타한다. 소남은 결국 6개월 된 젖먹이 딸을 남편에게 빼앗기고 이혼하고 만다. 그런 와중에 양어사업소에서도 소남을 해임한다. 이유인즉 사업소 앞으로 '1호 도로'(김일성 전용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토대가 나쁜 사람을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남은 그후 가구공장에 배치 받아 가고 두 번째 반려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탄광 노동자였던 남편은 8년만에 갱 안에서 낙반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다시 실려간다. 후에 그를 아는 사람이 보위부의 한 수용소에서 그를 보았다고 한다.

북한에는 이태준의 가족보다 몇 배 더 비참한 생을 살다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굳이 이태준과 그 가족 이야기를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이태준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이태준 뿐 아니라 이태준의 자녀들도 모두 뛰어난 수재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이태준의 자녀들은 거의 대부분이 김일성대학을 나왔고 김일성대학에서도 아주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러한 우수한 인재들의 능력을 거의 조금도 활용하지 못하는 북한 체제의 경직성에서 현재의 북한의 낙후성이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일제 시대 이화여전 학장이던 김활란이 휘문고보 중퇴라는 보잘것없는 학력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중시하여 이태준을 강사로 채용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태준의 가족사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철저한 연좌제를 볼 수 있다. 이는 한 사람이 정치범으로 걸리면 그 가족 전체를 정치범 수용소에 집어넣은 수많은 예들에서 누차 확인해왔던 바이다. 북한에서는 말로만 ‘봉건잔재의 철폐’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봉건잔재를 많이 남겨 놓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이태준이 남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자유롭게 문학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해방 전에는 특별한 정치활동도 없었고 또 주로 순수문학만 했지만 해방 후에는 민전 핵심간부까지 지낸 그가 남한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 학살당했을 확률이 70∼80%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가끔 한번씩 끌려가서 고문당했을 것이고,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 구속시켰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에 본인 스스로는 단 한번도 정치활동에 참여해본 적도 없는 평범한 생업인이지만 단지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중앙정보부에서 가끔 데려가서 고문했던 예들을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중에 어떤 분은 그런 처지때문에 자식에게까지 이런 끔찍한 고통을 물려주기 싫다며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았다.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역사적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정확한 역사인식과 올바른 노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남한에서는 민주화투쟁과 시민의식의 발전, 정권의 변화 등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완전히 변했지만 북한에서는 인권상황이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태준이 두 번째 탄압 받고 평양에서 추방되었을 때가 1974년이라는 것이다. 1974년이면 김정일이 집권했던 바로 그 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적지 않은 탄압 사례들이 1974년과 그 직후 몇 년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김정일이 집권한 후 그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도 상당히 많은 탄압사례들이 드러난 것으로 미루어봐서 나중에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김정일의 집권 과정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집권과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탄압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태준의 막내딸 소현이 평북 산골의 평범한 농부와 재혼해서 농민의 아내로서 살아가던 90년대의 어느 날, 큰언니 소명이 소현을 찾아와서 나눈 대화의 일부분은 우리에게 많은 여운을 남기게 한다.

“언니, 우리 아버진 번호가 맞지 않는 수재였어.”

“그래.”

“언니, 내가 호미자루에 인생을 맡기고 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지?”

“난 아이들에게 문학 안 시키겠어. 농사일이 좋아. 일년 땀 흘리면 그해 그해 결실이 열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