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북한의 남북교류 속도조절
남북정상회담 이후 급진전의 양상을 띠던 남북관계가 점차 거북이 걸음을 하게되면서 그 배경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북한이 남북 합의사항인 이산가족 교류, 경의선 복원사업 등에 대해 지연시키는 태도를 보이게 되면서 그 원인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의선 복원, 개성공단 조성 등은 이미 실행단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늠하는 현실적인 지표로는 이산가족 사업이 주목되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난 10월말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남북교류(사실상 이산가족교류)에 대해 북한으로부터 감속 요청을 받았다고 공개하면서 북한의 남북관계 속도 줄이기가 단순한 남측의 넘겨짚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장관의 발언직후 북한에서 제2차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위한 예비후보 200명의 명단을 우리 측에 보내어, 북한의 속도 줄이기라는 이슈를 논하던 사람들을 일순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나 싶던 북한의 속도조절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은 북한이 장충식 대한적십자사총재의 『월간조선』 인터뷰 내용을 문제삼으면서부터이다. 11월 3일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의 성명에 의하면 장총재가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북한 체제 비방·중상에 이용했으니 그가 총재로 있는 한 대화도 않을 것이며 11월 30일부터 2박3일간 실시할 이산가족 2차 교환방문과 12월 13일로 예정된 3차 남북 적십자회담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총재의 인터뷰 내용이 북한비방이라고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장 총재의 인터뷰가 실린 『월간조선』 10월호가 지난 9월 20일 발매됐는데, 북측이 한달 반이나 지나서 성명을 발표한 점도 석연치 않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즉 북한이 이산가족 교류를 지체시킬 구실을 찾는 과정에서 장총재가 걸려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뚜렷한 증거를 찾기 어려워서, 단정을 할 수는 없지만 북한이 이산가족 교류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평가는 가능하다.

최근 장총재가 북한에 비밀 서한을 보내 『월간조선』 인터뷰건에 대해 유감을 표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당국은 이를 공개해버리면서 장총재의 사과 또한 거부하는 외교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였다. 이런 상황을 보더라도 북한이 장총재의 인터뷰 내용 그 자체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느꼈다기보다는 이산가족 교류를 지체시키는 좋은 구실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의 원인에 대해 북한이 북미관계 개선에 몰두하면서 일시적으로 남북관계를 뒷전에 두는 것이라는 해석이 통일부 당국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은 한 가지 목표가 정해지면 모든 역량과 자원을 몰아넣는 속도전을 벌이는데, 현 단계에서는 미·북 관계 개선이 최우선”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상충되는 것도 아니고 외교가 무슨 생산활동도 아닌데 이런 해석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또한 북한이 전통적으로 북미관계를 더 중시하고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입장 때문에 굳이 남북관계를 더 진전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과거에 북한이 이런 경향을 가졌던 것은 미국을 더 중시하는냐 이전에 남한과 관계개선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남북정상회담을 한 것을 계기로 북한의 대남정책이 큰 전환을 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현재는 걸맞지 않다고 평가된다.

남한의 북한전문가들이 간혹 놓치고 있는 대목은 북한이 대남관계는 개선의 방향으로 전략수정을 했지만 대내정책은 어떠한 수정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주민들에 대해 각종 정보를 차단하고, 정권유지에 유리한 정보만을 제공하며 물리력을 동원하여 강력한 통제를 가하는 기존의 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있으며, 전환할 의사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북한정권이 이산가족 교류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지난 1차 이산가족 교류에서 확인되었듯이 남쪽에서 가는 사람들은 주로 월남자들이기 때문에 월남자 가족을 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심한 북한에서는 하층에 속하는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북한당국은 이 과정에서 남한의 실상이 북한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다. 남한으로 오는 북한 측 사람들도 비교적 권력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선별되기는 하지만 북한당국의 입장에서 불안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북한당국이 내부 통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한에서는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남북 민간교류는 항상 부담이 되고 어느 정도 능력의 한계를 갖게 마련이다. 교류의 사전사후에 관련된 주민들을 감시하자면 그 인력도 만만치 않으며, 아무리 통제를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틈이 생기게 되는 만큼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북한이 2차 이산가족 교류를 앞두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장총재의 발언을 문제삼아 걸고넘어지는 등의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특별히 심오한 이유들을 찾느라 정력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산가족문제를 계기로 김정일정권이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남한의 경제적 도움을 받자는 것, 철권통치체제를 유지하는 것,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쫓는 것은 일종의 큰 도박이라고 할만큼 상충과 갈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이후에도 북한정권이 적어도 이산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정권의 딜레마는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노골적으로 무성의를 보이게 되면 남한의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남북관계 개선을 강력히 추진하는 남한정권의 입지도 약화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