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s' Comment: 북한의 대 서구 외교와 인권문제
남북정상회담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대북 접근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기에 국내 한 일간지의 조그만 외신보도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11월 7일자 『세계일보』의 이 기사는 『파이낸셜 타임스』 독일어판 기사를 요약한 것인데, 독일의회 대표단을 이끌고 10월 31일부터 5일간 북한을 방문했던 한스-울리히 클로제 하원 외무위원장이 베이징에서 가진 기자회견에 관한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이 인권문제 등 쟁점사안에 대해 비타협적인 자세를 고수하고 있으며, 클로제 위원장은 “여러 현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북한측의 완강한 태도로 대화가 어렵게 진행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기사는 또 같은 시기에 북한을 방문한 유럽의회 대표단도 국제사면위원회가 조사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북한측에 요청했으나 답변을 얻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독일 통일 이후 북한을 방문한 최고위급 독일 인사인 클로제 위원장의 방북은 ASEM회의 기간 중(10월 20일)의 한독 정상회담에서 슈뢰더 독일 수상이 북한과의 조기수교 의사를 밝힌 이후 이루어진 것이라 북한의 대 서방 관계개선 노력에 탄력을 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방북은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의 희망에서 벗어나 독일 측의 대북 불신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그가 방북 직전에 가졌던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성급하게 수교를 추진해서는 안되며 대북한 수교 문제는 유럽연합(EU)이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ASEM회의 후 독일 측이 여러 차례 표명한 대북 조기수교 의사에 비춰본다면 집권 사민당 소속인 클로제 위원장의 이 같은 태도는 뜻밖으로 보인다. 사민당이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수적인 정치시각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이 최근에 있었던 재북(在北) 독일인 의사 노어베르트 폴러첸씨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그 배경은 납득이 갈만한 것이다. 북한에서 구호활동을 해온 폴러첸씨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 취재를 위해 북한에 온 서방기자를 허가 받지 않은 지역으로 안내했다는 이유로 추방명령을 받았다가 독일 정부의 항의로 추방을 면했다. 북한 당국이 연출한 장면만을 취재하는 걸 원치 않았던 『LA 타임스』 등 서구 언론들은 그의 도움으로 미흡하나마 평양 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북한 사회의 모순이 외부세계에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온 북한 당국이 그를 반혁명혐의로 추방하려 한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과거와 같았다면 그는 북한에서 추방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독일을 비롯한 EU국가들과의 수교를 모색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이 일로 그들의 외교노력이 상처를 입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사건은 국제사회의 압력 앞에서 북한이 과거와 같이 국제적 상식을 무시한 유아독존적 행동을 계속하기 곤란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아직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앞으로 북한이 대 서구 외교를 강화하고 더 많은 국가들과 수교할 경우 비슷하게 곤혹스런 상황에 부딪칠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 틀림없다.

북한은 최근 미국, EU 등 외부세계와의 관계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정일은 아마도 그렇게만 되면 외부의 지원을 받아 파탄상태의 경제를 부분적으로나마 복구하고 갈수록 이반되어 가는 통치기반을 추슬러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고 이어 서구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적극 나선 것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절망적인 경제상황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만일 미국 및 EU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면 일본도 이를 따를 것이고 김정일은 일본 및 기타 서구국가들의 막대한 경제지원으로 현재의 난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이런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커다란 난관이 있다. 그것은 인권문제이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으로 경제지원을 끌어내 왔던 북한이 이제 국제무대에서 서구국가들과 국교를 맺고 이를 바탕으로 정상적인 경제지원을 받으려 한다면 인권을 외교정책의 주요소 중 하나로 간주하는 서구국가들의 눈앞에 필연적으로 북한 내부의 인권상황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북한 당국이 아무리 잘 짜여진 연출로 이를 은폐하려 해도 북한사회의 구석구석을 살필 서구언론을 무한정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외교란 단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라고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서구에서는 예전처럼 통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까지 현실외교에서 인권이 최상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인권문제를 도외시한 외교정책은 곤란하다는 것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목격한 서유럽 사회의 내부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의 냉정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북한과 같이 상상을 절한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사회가 유럽인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지는 자명하다. 특히 여론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지식층 사이에서 국경을 넘어선 세계주의적 견해가 갈수록 힘을 얻어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점점 국제사회에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북한의 인권상황은 서구 지식인들의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워 질 것이다.

EU 국가들이 대북 관계개선을 적극 모색하고 있는 것은 인권에 대한 관심을 접어서라기보다는 북한과의 적극적인 접촉이 김정일의 정책변화를 더욱 촉진하며 궁극적으로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에도 더 효과적이라는 한국정부의 설득을 수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북 수교 이후 서구의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은 약화되기보다는 강화될 것이다. 서구의 대북 지원은 분명 김정일의 독재에 유리하게 작용할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와 병행될 국제사회의 북한인권에 대한 감시는 북한사회의 민주화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개방 후 북한 주민들이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점차 인권사상에 눈을 뜨게 될 것을 우려하는 김정일로서는 정치적 함의에 있어서 그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정일이 이러한 곤경에 처해 인권상황의 개선에 적극 나설지 아니면 어렵게 연 대외개방의 문을 다시 걸어 잠글지는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태도는 물론이고 북한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핵심요인이 될 것이며 그가 이러한 위기의 순간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