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북한 정치범수용소
정치범수용소란 무엇인가?

북한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치 않고 있는 정치범수용소는 그러나 일반주민들 사이에선 완전독재대상구역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당국에선 14호 관리소, 15호 관리소 등00호 관리소라 부르며 국가보위부에서 담당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소라 하면 감옥을 생각하기 쉽지만 완전독재대상구역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인 감옥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통상 정치범수용소는 깊은 산 속에 있는 마을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마을들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완전독재대상구역으로 설정해 놓고 그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삼엄한 경비를 서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겉에서만 본다면 그곳이 수용소인지 알 수가 없다. 강철환, 안혁씨가 있었던 15호 관리소는 함경남도 요덕군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묘덕수용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치범수용소의 마을들은 각각 나뉘어져 있다. 북한에서는 연좌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당사자만 끌려가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 일가족까지 수용된다. 그래서 한 마을에서도 독신자구역과 가족세대는 나뉘어져 있다. 또 재일동포들을 모아 한 마을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전역에 퍼져 있는데 현재 위치가 확인된 곳만도 평안남도에 개천(14호, 18호), 동신, 평양승호구역(26호, 90년 1월 이동)이 있고, 함경남도에 요덕(15호), 평안북도에 천마(27호, 90년 11월 이동), 함경북도에 온성(12호, 87년 5월 이동), 종성(13호, 90년 12월 이동), 회령(22호), 청진(22호), 경성(11호, 89년 10월 이동), 화성(16호)구역이 있다. 북한 당국은 정치범수용소의 위치가 외부에 알려지면 그곳을 폐쇄하고 위치를 이동하기 때문에 이들 중 상당수가 위치를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알려진 것만 12개 수용소에 20여만 명 이상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 범죄와 다르게 일단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면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다. 일반 범죄도 억울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몇 년형 선고라도 받아 언젠가는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데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수용기간이 없기 때문에 노예처럼 죽도록 일만 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감해야 한다.

정치범수용소는 크게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혁명화구역은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이 중의 일부는 다시 사회로 나오기도 한다. 요덕수용소의 경우 재일동포가 상당수 있는데 재일동포의 경우 북한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 필요성이 떨어지면 별다른 죄도 없이 끌려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 중에는 일본의 친척들의 송금액에 따라 사회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권력중심부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도 김정일의 필요에 따라 정치범수용소에 보냈다가 어느 정도 교육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사회로 내보내기도 한다. 강철환씨와 안혁씨의 경우가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사회로 나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그 전체 숫자와 비교하면 아주 적은 경우이고 대부분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혁명화구역에서도 완전통제구역으로 다시 끌려가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보위부원들에게 반항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끌려간다. 강철환씨의 증언에 의하면 기독교를 몰래 믿다가 혁명화구역에 끌려온 교인이 이곳에서도 몰래 기도를 하다가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완전통제구역은 말 그대로 한번 끌려가면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는 구역을 말한다. 이곳에 끌려간 이들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북한 건국과정에서 분류된 지주, 친일파, 종교인들과, 한국전쟁 당시 치안대에 가담한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과 김정일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숙청된 사람, 북한체제나 김일성, 김정일을 비판하거나 혹은 몰래 외국 사람과 접촉한 유학생이나 직원들, 그리고 최근에는 식량난 이후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 중 남한사람과 접촉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완전통제구역은 평안남도 동신, 개천 그리고 요덕군 평전리와 용평리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다는 점과 억압강도가 혁명화구역보다도 훨씬 심해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조차 완전통제구역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라고 하는데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중에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가게 되면 도중에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수감자들의 보위원에 대한 행동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혁명화구역에서는 보위원이 지나가면 90도로 인사를 하지만 완전통제구역에서는 무릎을 끊어야 하고 1999년 탈북한 김용씨가 수감되었던 14호 관리소의 경우는 뒤로 돌아서서 무릎을 끊어야 한다. 물론 노동강도는 훨씬 강한 반면 식사량은 훨씬 적어 더욱 생존하기 힘들다. 그리고 같은 완전통제구역에서도 그 차이가 있다. 김용씨는 14호 관리소에 있다가 국가보위부 고위직의 배려로 18호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14호에 비하면 18호는 천국이라고 하였다. 14호에서는 탄광에서 작업을 하였는데 자신이 일하는 무진2갱 이외의 사람들은 볼 수도 없고 새벽 6시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굴에서 작업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용씨는 그래도 지상에 나와서 잠을 잤지만 김책공대 지질학과의 한 교원의 증언에 의하면 자강도 발원금광에서는 수감자들이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로 잠도 지하 300m에 있는 굴속에서 잔다고 한다.(김정연 著 좬평양여자좭 1995년, 고려서적 발간) 그곳의 수감자들은 죽기 전에는 햇볕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수감자들의 대부분은 탈출을 꿈꾸기도 하지만 정치범수용소에서의 탈출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 금방 포기하고 만다. 대부분이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고 이중 삼중의 철책과 함정이 있기 때문에 탈출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죽고 만다. 또, 수인들의 대부분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기 때문에 성공하기도 힘들다. 비록 강철환씨의 증언처럼 특수부대 출신의 젊은 독신자가 탈출에 성공하여 중국에서 체포된 경우도 있고 1999년에 완전통제구역에서 탈출한 김용씨의 경우도 있지만 정말 극히 예외이고,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이 해외에 알려질 것이 두려운 북한 당국의 강력한 통제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도저히 못 견디는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다. 만약 수인이 자살을 하면 그 가족의 수용 기간이 연장되거나 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살건수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범수용소의 관리는 국가보위부 소속 보위원들이 담당하고 정치범수용소의 경비는 국가보위부 소속 경비대가 감당하고 있다. 안명철씨가 국가보위부 7국 경비대 소속이다. 보위부원 중에는 간혹 인간적인 사람도 있으나 얼마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만약 수인들을 도와주는 것이 발각될 경우에는 탄광으로 쫓겨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범들을 가혹하게 다룰 수밖에 없고 점점 비인간화된다. 오가와 하루히사 일본 동경대 교수는 이를 두고 수인과 보위원이 다 야만인이 된다며 개탄했다.

정치범수용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정치범수용소는 애초에 지주와 친일파, 종교인 등을 수용하는 시설로 만들어 졌다가 몇 차례의 변화 과정을 겪게 된다.

우선,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남로당파, 소련파와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한국전쟁 과정의 월남자 가족, 치안대 가담자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확대된다.

다음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말까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중앙당 집중지도사업과 주민재등록사업이 실시되면서 전 주민을 핵심계층, 적대계층, 중간계층으로 분류하고 다시 51개 성분분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중 적대계층을 강제수용소에 구금하게 된다. 그리고 60년대 후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자들 또한 강제수용소로 보내게 된다.

그리고 1972년 정치범수용소의 관리가 사회안정성에서 국가보위부로 이관되면서 전국적으로 정치범수용소가 증설되고 통제 또한 강화된다. 이 시기에 정치범수용소와 수인들이 대거 늘어나면서 폭동과 탈출이 몇 차례 일어난다. 안명철씨의 수기 좬그들이 울고있다좭에 당시의 폭동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1970년대 초에 12호 관리소인 온성에 있는 탄광에서 정치범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삽과 곡괭이, 도끼 등으로 보위원과 경비대 군관들이 출근한 뒤에 가족마을을 덮쳐 보위원들의 아낙네들과 아이들을 죽이지만 결국 경비대의 기관총과 자동소총에 정치범 5,000명이 몰살당한다. 이러한 몇 차례의 폭동 이후 경비대와 보위부는 정치범들을 더 악랄하게 다루고 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국가보위부에서 담당하면서 정치범수용소의 형태와 관리방법의 틀이 이 시기에 잡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1980년 김정일의 권력세습과정에서 이에 반대한 사람들과 그 가족 15,000여명이 대규모로 수감되고 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사회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유학생들과 외교관들이 대거 수용된다. 그 외에도 북송 재일동포들과 그 가족들도 70년대 후반부터 상당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종합해 보면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건국과정에서의 성분불량자를 시초로 하여 만들어 졌으나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대규모로 증설되고 유일사상체계의 확립과 김정일의 세습과정, 사회주의 몰락과 식량난 이후 체제유지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