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인에 대한 평가는 업적에 따라야 / [민족통일] 편집부
지난 6월에 북한의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상대로 벌인 영리하고 재치 있는 외교 활동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라 그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남쪽에 적지 않게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김정일과 같이 오래 동안 일을 해온 사람들과 그의 치하에서 인권을 철저히 유린당해온 탈북자들의 말을 믿지 않고 김정일을 계속 과소 평가해온 사람들이다. 충분한 근거 없이 남을 깔보는 사람들은 또 충분한 근거 없이 갑자기 남을 숭배하는 법이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자신이 어떻게 자기 소개를 교묘하게 잘 하는가에 따라 할 것이 아니라 그가 해 놓은 업적을 놓고 객관적 기준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우리는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업적’과 관련한 몇 가지 지적을 하려고 한다.

북한 인민들은 오랜 기간 피땀 흘려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한 결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의식주에서는 큰 걱정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김정일이 모든 것을 틀어쥐고 국가를 관리한 결과 수백만 인민들이 굶어 죽는 참사를 빚어냈다.

1995년부터 시작된 엄중한 식량난이 근래 와서 최악의 고비는 넘겼다고는 하지만 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체면을 무릅쓰고 외국에 식량을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것이 북한 독재자의 정치적 업적의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김정일은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를 철저하게 조직화하고 인민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구체화하였다. 당의 독재에다가 ‘선군(先軍)사상’을 구현한 군사독재를 배합하게 하였으며, 당의 경제와 군사경제를 인민경제로부터 분리시키고 경제 분야에 대한 독재를 전례 없이 강화하였다. 이렇게 하여 북한을 전대미문의 개인 독재국가로 만들었다. 이것 역시 북한 독재자의 정치적 업적의 하나이다.

김정일은 아웅산 사건과 KAL기 폭파사건 등 많은 테러사건을 직접 조직, 지도함으로써 북한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테러국 대열에 들어서게 하였다.

김정일은 문학예술의 천재라고 자기를 선전하고 있지만 북한의 문학예술은 수령우상화의 도구로 완전히 기형화되었다. 그는 또 벼랑끝 전술, 고자세 외교 전술의 창시자로 자처하며 뛰어난 외교가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시켰다.

정치가의 업적은 어디까지나 인민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얼마나 안겨 주었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다 동원하여 선전하여도 오늘날 북한의 인민 대중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산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통제구역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십 만의 죄 없는 ‘죄인’들과 짐승 대우를 받는 탈북자들의 가족, 친척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13년 동안이나 군대복무를 강요당하고 있는 청년 학생들의 처지도 비참하고 기형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북한의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번 평양회담 하나로 김정일을 재평가하려 들고 있다. 그가 진정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식견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번 회담에서 북한 2천3백만의 운명과 직결된 좀더 절실한 문제부터 다루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2천3백만의 생목숨을 구원하는 것이다. 얼마 전 유엔아동기금에서는 북한의 5세미만 영아 중 62%가 발육장애자라고 밝혔다. 북한에서는 지금 헤어날 길 없는 굶주림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한 세대가 철저히 파괴되어 가고 있다.

한 가정의 가장도 먼저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부터 가정 살림을 운영해나가는 법이다. 그런데 ‘인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제 백성을 수백만 명이나 굶겨 죽이고 수천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걱정은 한마디도 없이 ‘평화공존’이니, ‘연방제’니 하는 따위의 요원한 문제로 탁상공론만을 일삼았으니 이를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다. 백성이 있고야 나라도 있고, 평화공존도 연방제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북한의 식량위기 해소를 의제로 남한의 대통령과 단 한마디만 거론했어도 김정일을 다소나마 달리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정상 중 어느 누구도 굶주림에서 헤매고 있는 동족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발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국내외 탈북자들과 북한 동포들에게 이번 정상회담이 진실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원인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 탈북자들은 이번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김정일은 독재자로서는 탁월하지만 인민을 위한 정치가로서는 적격자 이하(以下)라는 초심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듯이 앞으로의 김정일에 대한 평가 역시 그의 행실이 결정할 것이다. 그 누구도 최종적인 역사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탈북자들은 김정일 독재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며, 북한 통치자의 천인공노할 죄행의 산 증인들이다. 때문에 탈북자들은 생명을 걸고 김정일 독재체제를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김정일 독재를 반대하는 싸움을 그만둔다는 것은 북한에서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있는 가족들과 동지들, 그리고 전체 북한 동포들의 염원을 배반하는 것이며,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애국자들과 혁명가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으로 된다. 반대로 우리가 결사항전을 벌여 도탄에 빠진 동포들을 구원하고 민족통일에 이바지하게 된다면 애국자의 고귀한 영예를 지니게 될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조리 김정일과 타협하고 그를 포용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만은, 우리 탈북자들만은 절대로 그럴 수 없으며 그와의 투쟁을 끝까지 하여야 할 것이다.

* [민족통일]은 사단법인 <탈북자동지회>의 기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