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ark: 조명록의 방미와 급류를 타는 북미관계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의 미국 방문이 10월 12일 북미 공동성명을 내놓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와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 및 코언 국방장관과의 회담에 이어 클린턴과의 면담이 있은 후 발표된 이 공동성명은 지난 반세기간 적대관계를 유지해 온 쌍방간의 관계개선에 새로운 초석을 놓았다.

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은 한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정전협정을 평화보장체제로 바꾸는 것과 관련하여 4자회담을 고려한다는 것, 적대정책 포기를 선언하고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자주권' 존중과 ‘내정불간섭' 원칙의 준수, 경제교류의 촉진,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유예, 제네바 핵합의의 이행, 테러에 대한 반대원칙의 천명, 올브라이트의 평양방문계획 공표 등이다.

성명의 문안에 구체적인 합의내용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올브라이트의 평양방문이 약속되고 클린턴의 방북까지 추진되고 있는 걸로 보아서 그간 미국의 대북 불신의 근거가 되어왔던 현안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현안들이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 테러지원 문제이다.

그 반대급부로 북한으로서는 그간 끈질기게 요구해온 미국의 북한체제 존립보장과 테러지원국 해제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은 그간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의 대북 지원에 근본적인 장애가 되어 왔으므로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한에 대한 외부의 경제지원이 새로운 탄력을 받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북미간의 관계개선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형성과정에서 자국만이 소외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일본의 대북한 관계개선도 압박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북일관계가 진전될 경우 북한은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식민지배 보상금을 얻어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전망은 북한의 실질적인 태도변화를 전제로 한다. 우선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무기한 유보한다든지, 핵투명성을 보장한다든지, 요도호 납치범을 추방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 중 요도호 납치범 문제를 제외한 두 가지 현안은 완벽한 해결이란 것이 쉽지 않은 것들이다. 북한으로서는 핵과 미사일이 단지 협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외관계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유력한 체제보장 카드이므로 이를 계속 보유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 점이 지금까지 미국 내 대북 불신론의 근거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북미간 고위급 회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일정한 타협점이 모색된 - 또는 그 가능성이 확인된 -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클린턴의 방북까지 공개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의 대외정책이 개방적인 방향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다만 지난 번 노동당 55주년 행사에 남측 인사들을 초청한 것이나 이번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해 주체를 애매모호하게 흐려놓은 것에서 북한이 여전히 화(和)뿐만 아니라 전(戰)의 가능성도 열어놓는 양면정책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권력유지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북한이 다시 과거의 정책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엄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북한의 대외적 태도변화는 과거의 행태와 비교해 볼 때 획기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외부와의 긴장을 최대한 조성해 내부를 단속하고 경제지원을 이끌어내던 기존정책에서 벗어나 남한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정상적인' 대외관계를 형성해 체제존립을 이뤄보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정권이 이러한 변화를 모색하게 된 근본이유는 물론 최악의 상태에 있는 북한의 경제사정에 있다. 그간 대외 위협을 통해 경제회생을 꾀하던 김정일 정권은 핵과 미사일, 테러지원 문제와 관련한 입장전환 없이는 미, 일과의 관계개선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절실히 요구되는 서방자본과 기술의 획득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미국의 대북한 정책의 압축판인 페리보고서는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북한에 전달했으며,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정상회담을 돌파구로 한 남북 관계개선도 김정일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과의 긴장완화를 통해 미국과 일본에 접근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의 이러한 시도는 대선을 앞두고 대외정책의 성과를 절실히 원하는 미국 클린턴 정부의 필요성과 맞아떨어져 양국관계에 예상외의 급진전을 이루어낸 것이다. 만일 북미간에 실제로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남북한과 미국 3자 관계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일본을 포함한 이 지역 전체의 질서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남북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며 북한주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생산적 결과를 낳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아직도 경각심을 풀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높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김정일의 대외개방 모색이 북한사회 내부의 개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북한사회의 경직성을 감안하면 대외개방이 체제불안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작지 않은 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대외개방정책도 위협을 받게 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는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후 북한에 대해 대외개방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논의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북한체제의 경직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북한이 대외개방에 발맞춰 경제제도의 개혁과 인권상태의 개선 등과 같은 내부개혁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 여부는 북한의 대외개방정책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북한주민들의 인권문제를 제일 관심사로 하고 있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는 앞으로 김정일의 대내정책 변화여부를 주시하며 인권을 존중하는 국내외의 양심세력들과 연대하여 북한의 사회개혁과 인권상태 개선을 압박하는 활동을 더욱 가속화 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