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 in SK Interview: 북에 두고 온 첫사랑에 마음이 아린 우리 친구 김군일
1980년 9월 3일 함경북도 무산 출생. 1997년 5월 탈북. 1998년 6월 23일 입국. 현재 수원 협성대학교 신학과 2학년 재학중.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김군일씨의 전부다. Keys 1,2호를 통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장인숙 여사와 이민복 선생처럼 이름 석자 앞에는 어떤 미사여구나 호칭도 없는 평범한 청년. 난 오늘 지금의 이 시대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을 한 청년을 만나러 수원에 간다.

그는 의외로 키가 작았다
내가 초행길임을 말하자 그는 마음씨 좋게 마중 나오겠다는 얘기를 했다. 먼저와 기다리고 있던 나는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이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잠시 후 그런 걱정은 괜한 기우였음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나타났다. 내가 먼저 그를 알아봤고(물론 그는 나를 본적이 없다 ), 눈인사와 목례를 하자 그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싶은 표정을 짓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날 찾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난 여유로와졌다. “저, 김군일씨죠!”시간에 맞추기 위해 조금 뛰었나 보다.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더위를 피해 근처 찻집으로 인터뷰 장소를 정했다. 물론 둘의 합의하에. 역 앞을 벗어나 시내 쪽으로 걸었다. 초행길임을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나란히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는 의외로 키가 작다고…

"사실 이런 찻집이 익숙하진 않아요.”

우리는 냉녹차를 주문했고 차가 나오자마자 그는 반 이상을 한 숨에 마셔버렸다. 방금 탁구를 치고 오는 길이란다. 당구도 아니고 왠 탁구! ‘수업’이라고 했다. 지난 학기엔 볼링을 했고 이번에는 탁구. 북에서도 이런 생활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북한의 탁구는 꽤 유명하지 않은가. 남북단일팀을 꾸리내 마내 할 정도로. 한국에 입국해서 4개월 정도 조사를 받는 동안에 탁구를 처음 배웠다고 한다. 그 때 배워둔 실력으로 탁구 점수가 좋게 나올 것을 생각하니까 마냥 기쁘단다. 그런 그가 지난 학기 볼링을 치면서 점수 걱정을 얼마나 했을까는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또 한 숨에 남은 반을 다 마셔버리고는 씩씩하게 일어나 물 한 잔을 가득 채워서 온다. 그 모습이 예전 우리들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뭉클 정겨워졌다. 이것저것 더 달라고 하기 미안하다며 접시 들고 가서 직접 담아오던 우리들 모습. 내가 빙그레 웃자 그가 말한다.“사실 이런 찻집에 익숙하진 않아요. 그저 좀 가난한 대학생일 뿐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 그의 최종 학력은 우리식으로 하면 고졸이다. 함경북도 무산군 학산고등중학교 6년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인 셈이다. 대학을 가야할 나이에 그는 탈북을 결심했고 1년의 기간동안 중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런 그의 고통의 시간을 입시 스트레스로 삭막해진 한국의 고3들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흔하게들 얘기한다. 내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힘겹다고. 그렇겠지. 그런데 그는 대학에 가기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한다거나 좀더 나은 대학에 가기 위해 시간을 쪼개는 따위의 그런 고통이 아니었다.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과 도박을 했을 뿐. 위험천만한 그 도박에서 그는 승자가 되었고 승자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대학생이 되고자 했다. 그건 북한에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자신을 생각하며.

“꿈이 법학을 하는 것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나 주위에서 너는 변호사를 해서 말로 벌어먹어야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한국에 와서 보니까 검사니 변호사니 '사' 자(字)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대우를 받고 돈도 잘 벌고 그렇더군요. 여기 사람들도 하기 힘든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냐 싶겠지만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니까 가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탈북자들에게 특권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서울대 법학과도 선택만 하면 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는 서울대 법학과가 아니라 협성대 신학과를 선택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서울대 법학과로 진로를 결정하고 나서부터 이상한 일이 많이 있었단다. 그리고 그 전엔 없었던 주변의 권유가 부쩍 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속물 같은 계산이 아닌 많은 고뇌를 거쳐 신학대를 선택했고 지금은 아주 만족한다고 얘기한다. 한편 이해가 가는 것은 중국의 사지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준 이는 남도 북도 아닌 인권운동을 하는 종교인들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들을 도왔던 그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받았고 자신도 신학공부를 열심히 해서 북한 선교를 하는 것이 이젠 꿈이라고 말하는 그가 우리 단체와 오버랩 되면서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서울대 법학과도 선택만 하면 보내준다니 등록금 정도야 국가에서 보장해 주겠지. 그럼 나머지 교재나 용돈은 어떻게 충당할까. 몹시 궁금해졌다. 영세민 신청을 하면 월 20만원 정도의 일정한 액수가 지급된단다. 나머지는 말 그대로 능력껏 자신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많지는 않지만 강연료, 가끔 초대되어 가는 행사에서 주는 수고비, 검소하게 사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고의 수입이라고 말하는 그는 정말 좀 가난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영어와 컴퓨터는 정말 힘들어요.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가 있어서 신학공부하기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뜸 영어와 컴퓨터 얘기를 한다. 무슨 말이든 영어가 섞여있지 않은 말이 없고 컴퓨터를 하려고 해도 영어를 모르면 안 되는 것이 많아서 힘들단다. 지난 학기엔 영어 점수 때문에 장학금을 놓쳤다고 굉장한 울분을 토하기까지 했다. 컴퓨터도 한국에 와서 처음 봤다고 했다. 수학을 굉장히 잘했던 반 친구(그의 첫사랑)가 있었는데 학교에 딱 한 대 뿐인 컴퓨터를 그 친구는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영재교육에 대한 교시가 있고 그 일환으로 특정 부문에 재능을 보이는 사람에게 주는 특혜를 그 친구가 받았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그 친구가 컴퓨터를 보고 와서 얘기를 해줬는데 그 명칭을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이 컴퓨터였던 것 같다고…

그런 그가 이제는 나도 모르는 게임얘기를 한다. 그래서 나도 거들었다. 다들 그렇게 자기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금방 느는 것이 컴퓨터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은 아니지만 내겐 너무도 익숙한 그 말을 풀어놓으면서. 나보다 낫다는 말만 쏙 빼고 훈수를 둔 셈이 되어 버렸다. 미국보다 중국이 더 가깝게 느껴지듯 영어보다는 중국어가 더 좋단다. 물론 중국에서의 1년이 고통도 있었지만 그 때 배워둔 중국어가 실력을 발휘한 셈이 되었지만. 지난 학기의 영어로 고배를 마신 대신 이번 학기엔 좀 자신이 있는 중국어를 선택했고 교수님과 농담을 할 정도로 실력이 된다는 얘기를 한다. 이렇게도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하는 그의 눈에는 왠지 서글픔이 고여 있는 듯 했다. 이번 학기엔 중국어 때문에 장학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 그는 여전히 가난한 대학생이고 또 그렇게 되면 중국에서의 고통을 조금이라고 보상받지 않을까 하는 내 소박한 바램이.

“그녀가 궁금하다.”

요즘도 내 첫사랑은 꿈속으로 가끔 날 찾아온다. 내가 부른 것인지, 그 사람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도 그런 그녀가 있단다. 지금도 그녀가 제일 궁금하고 가장 보고 싶고 꼭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 있었으면 하는. 바로 그녀. 수학을 잘해서 특권을 누렸던. 얼굴이 무척 예뻤고 공부를 무척 잘했다는 그녀. 탈북하기 전 본 것이 전부고 그 뒤론 그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는데 요즘은 부쩍 많이 생각이 난다면서 얼굴이 예뻐서 좋아했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그가 밉지가 않다. 한국에 와서는 딱 한 번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학교를 그만두면서 끝이 났다고 한다. 그 뒤론 별 생각도 없고 또 자신도 없다고. 처음 한국에 들어와 선배 탈북자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는 여자를 조심하라는 얘기였다고 한다. 잘해준다는 것이 곧 사랑은 아니라고. 그런 이유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다.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그는 씩씩하게 말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은 현재에 충실하고 싶다고. 상처에서 오는 오기가 아니라 그만의 사랑법을 터득한데서 오는 자신감이길 간절히 바란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임으로.

조성모를 좋아하고 비디오를 보면서 날을 꼴딱 새워 아침 강의시간 내내 졸고 있는 그를 상상해 보라.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대학생이다. 아니 오히려 남과 북을 동시에 경험한, 그래서 내일의 한국엔 너무나 보배로운 존재인지 모른다. 그가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이 사회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우리 나라(남과북)에 소중한 재산으로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 시간 성심으로 인터뷰에 응해준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마지막으로 그가 이젠 덜 힘들었으면 한다. 여기에 다 옮기지 못한 그의 힘겨움이 아직도 많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