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단: “소설 「영생(永生)」을 통해 본 김정일 체제의 동요"/ 아라키 가즈히로
■ 荒木和博 - 아라키 가즈히로씨는 1956년생으로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일본의 민주사회당 중의원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으며 현재는 일본의 한반도문제 전문잡지 「현대코리아」 편집위원이자 다쿠쇼쿠(拓殖)대학 해외사정연구소 조교수로 있는 한반도문제 전문가이다. 이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월간 「해외사정」 2000년 2월호에 실린 이 논문은 Keys의 견해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문제를 보는 일본 지식사회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어서 필자의 허락을 얻어 전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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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영생(永生)」은 1997년 6월 북한에서 출간된 소설이다(문학예술종합출판사). 저자는 백보흠과 송상원 두 사람으로 되어 있다. 저자의 인적사항에 관해서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1993년 섣달 그믐날부터 김일성 사망 후 영결식이 끝난 후까지를 그린 소설인데, 김정일에 관한 극히 민감한 문제가 몇 대목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미리 김정일의 허락을 받았거나 또는 김정일이 직접 지시를 해서 출판한 공식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구소련 하바로프스크 이었던 김정일의 출생지를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북한 영내 백두산 밀영으로 바꾸는 등 역사를 다반사로 바꾸어 왔지만, 이는 거꾸로 체제의 속내 또는 약점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소설 「영생」의 내용을 통해서도 김정일 체제가 갖는 문제점을 짚어볼 수 있겠다.


1. 「영생」에 나타나는 몇 가지 모순과 그 의미

1) 카터를 피한 김정일

1994년 6월 16, 17일 이틀에 걸쳐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 이 때 김일성은 “앞으로 10년은 더 정치를 할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또한 이 회의에는 김정일의 정적인 계모 김성애가 자리를 같이 하여 미군병사의 유해조사에 협조하자고 김일성에게 제안하고, 김일성도 이를 받아들인다. 소설 「영생」에는 이에 대해서는 전혀 적혀 있지 않으며 김일성의 당시 행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찬회가 진행되는 동안 김정일동지께서는 전연구분대의 한 지휘부에서 평양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수령님께서 진행하신 카터와의 회담소식을 듣고 계시였다.
그이께서는 회담의 성공을 기뻐하시였다. 허나 그 성공이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이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 성공의 리면에 수령님의 얼마나 큰 로고가 깃들고 있는가. 전화가 끝나자 그이께서는 부관에게 손을 내밀어 무엇인가를 요구하시였다.
부관이 그이의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문서용 가방에서 하나의 종이장을 꺼내드리였다. 그것은 주간 지자기현상 예고자료였다. 종이 우에 빠른 시선을 주고 계시던 그이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리었다. 다행히 이 주간에는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자기파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으시였다. 수령님의 건강이 언제나 념려스러우시였다. 너무 흥분하시지는 않는지. 약은 제때에 드시는지...(223쪽)>

이렇게까지 걱정이 된다면 회담의 일부라도 자기가 대신하든지 아니면 자리를 같이 하든지 적어도 평양에는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는 1994년 핵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고, 미국도 거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 때 ‘최고사령관’이 일개 부대의 시찰을 위해 지방에 내려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전술한 장면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 시기에 김정일의 당 중앙위 활동개시 30주년 캠페인이 실시되었다. 카터의 북한 방문 전날인 6월15일에는 당간부 양성부문 연구토론회, 인민무력부 연구토론회, 근로단체 연구토론회, 철도운수 부문 연구토론회가 열렸고 카터가 평양에 온 16일에는 전국 토론회가 개최되었으며 다음날 17일에는 각도 예술 선전대의 종합공연이 실시되었다. 이날에 카터는 판문점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가지만, 18일에는 중앙보고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여기서 추측되는 것은 김정일이 김일성,카터 회담에 관한 한 완전히 울타리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혹은 김정일 자신이 싫어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쨌든 울타리 밖에 있었다는 것은 김정일의 권위가 흔들렸다는 것일 터이고, 그 때문에 전쟁 직전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당 중앙위 활동 개시 30주년 캠페인’을 전개하여 위신 저하에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2) 김정일 대신에 김일성이 출석

김정일의 당 중앙위 활동개시 30주년은 「영생」에서는 김일성이 먼저 기념하자고 제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지금 인민들도 그래, 일꾼들도 그래 모두가 다 김정일 장군이 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한 날을 기념하자고 제기하고 있는데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었다.
“기념이라고 해야 저녁식사나 한끼 같이 하자는 것이겠는데 일없지 않겠소?”
수령님께서는 그 말씀 뒤끝에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들과 항일의 로투사들로부터 련명으로 된 편지를 받았다고 하시며 그것을 보라고 넘겨주시었다.(263쪽)>

그런데 소설 「영생」에서 김정일은 이 자리(기념행사)에 출석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신에 김일성이 출석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2년전 나는 김정일 동지의 생일 쉰돐을 맞으면서 앞으로 그의 생일을 민족적 명절로 기념할 데 대한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령은 지금까지 발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김정일 동지는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직 비서는 바로 그런 인간입니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조직 비서 대신에 여기에 왔습니다"(이상 270쪽) 즉 김정일이 겸손해서 이 자리에 안 왔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전술된 바와 같은 대규모 집회를 몇 번이고 열게 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은 출석을 안 하지만 집회만은 대대적으로 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집회는 김정일의 승인 없이 실시될 수가 없는 것인데, 김정일이 그 만큼 겸손하다면 재가할 때 승인을 안 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정일 대신에 나온 연석에서 김일성이 이렇게 말한다.

<동무들, 전통이 위대하면 계승도 위대한 법입니다. 머지 않아 21세기입니다. 21세기는 김정일시대입니다. 나는 21세기에 대하여 마음을 놓습니다. 김정일동지는 21세기의 태양으로 만민의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성공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노래에도 있는 것처럼 그가 없으면 조선도 없고 자주화된 세계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있어야 조국통일도 성취되고 세계의 자주화도 실현되며 21세기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동무들은 이것을 잘 알고 지금까지 나를 받들어온 것처럼 그를 잘 받들어줄 것을 바랍니다!>(272쪽)

김일성의 보증이 있었다는 알리바이다. 만일 당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이가 악화되어 있었다는 전제에 선다면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므로- 이 부분은 김정일의 권위 강화를 위해 씌어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3) 7월5일 전화의 의문

김일성이 죽기 직전, 7월6일에 열린 회의는 그 내용이 일부분밖에 전해진 바 없으나, 그가 개방정책으로의 전환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지시는 김일성이 죽은 후 잠깐 동안 '7·6유훈’이란 이름으로 개방파(주-개방파란 호칭은 편의적인 것이며, 명확히 조직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의 기치가 된 바 있다. 7월5일 아침의 전화 주고받기에서 이 회의에 김일성이 출석하는 것을 김정일이 강하게 반대하고, 김일성이 ‘총서기의 권한을 행사해서라도.....’라고 말했다고 「영생」에 적혀 있다는 것은 필자의 다른 논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부분 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지금까지 두분께서는 대체로 전화나 문건으로 사업상 련계를 취하시였지만 극히 중요한 문제가 제기될 때에는 김정일동지께서 직접 금수산의사당으로 찾아가 수령님을 만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집무실을 뜰 수 없는 바쁘신 속에서도 당의 로선과 정책과 관계되는 문제에 한에서는 결코 전화를 하는 일이 없이 수령님을 찾아오시였다. 그러한 때의 두분의 호흡은 언제나 일치하였고 순조로왔으며 뜨거웠다. 그것은 김일성동지의 마음이자 김정일동지의 마음이였고 또한 인민의 마음이기 때문이였다. 두분은 인민의 행복을 위한 일 때문에 자주 마주앉으시였고 밤을 지새우시였으며 인민을 위해 새벽길도 같이 걸으시였고 찬비도 같이 맞으시였다. 두분이 함께 기뻐하고 함께 괴로워하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 인민을 위한 일 때문이였다. 인민을 위한 의논에서 두분의 생각이 엇나간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371쪽)

그런데 이 날만은 달랐던 셈이다. 그러나 만약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았다면 과연 이런 방식으로 썼을까. 이 소설 속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부자간의 신뢰관계의 두터움은 거꾸로 보면 현실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의견의 같다면 김일성이 죽음 직전에 내세운 개혁개방정책을 계승해야 될 텐데, 김정일은 전혀 반대의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전해진 바 7·6유훈 속에서 개방정책에 대해 김일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부터 어떤 나라든 우리 나라와 경제합작을 원하는 나라와는 그렇게 할 작정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나라들과 경제합작을 하지 않아도 살아나갈 수가 있습니다만 경제합작을 해도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한편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된 1994년 11월 1일자 논문인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돈으로 인간을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방법에 의거하게 되면, 사람들의 혁명적 열의와 창조적 적극성을 제고하지 못할 뿐더러 사회주의 제도 자체를 변질시켜 위험에 내모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주장하는 등 ‘개혁개방은 체제붕괴로 이어진다’며 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당시에 아마 두 사람의 호흡은 일치하지 않았으며, 갈등이 있고 냉담한 관계였을 것이다. 김일성은 개방정책을 취한다는 전제하에 이 회의를 소집했으며, 김정일의 전화는 그것을 말리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카터가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 1994년 6월 14일에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개발과 발전소 건설관계부문 일꾼 협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김일성은 나진 선봉을 ‘중계업과 숙박업’으로 ‘잘만 하면 싱가폴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진·선봉 자유경제 무역지대를 잘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6월 초순경 김일성은 직소에 의해 비로소 보통의 인민이 식량난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하던 중 개방정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잘만 하면 싱가폴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극히 주먹구구식 관점이긴 하지만.
어쨌든 당시 두 부자(父子)는 정반대의 시각에서 보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 와중에 김정일이 김일성과 격론을 했다는 것은, 단지 정책상의 차이가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4) 김일성 사망시의 상황

소설 [영생]에서는 ‘경제부문 책임일꾼 협의회’가 7월5일과 6일에 ‘서부공업지대'(구체적 지명은 불명함)에서 열렸다고 되어 있다. 개방파의 중심적인 존재이었던 강성산 총리(당시)는 [영생] 에서도 ‘정무원 총리’로 실명 없이 등장한다. ‘정무원 책임 일꾼’이라는 말도 사용되고 있어, 이것도 강성산을 가리키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김일성의 질문에 대해서 ‘부총리들과 상담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회의의 내용을 묘사함에 있어서, <경제부문의 책임일군들과 일문일답으로 담화하시는 수령님의 목소리를 주의깊게 들으시었다>(385쪽)라고 쓰고 있다. 이 회의 상황에 대해 일설에는 김일성이 개방정책을 진행시키자고 한 것에 대해 객석에서 ‘그렇게 하면 망명자들이 속출하게 됩니다’라는 반론이 있었고, 그에 대해 김일성은 ‘쿠바도 망명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나라는 무너지지 않고 있지 않으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통상 북한에서 김일성에 대해 반론하는 행위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필자는 이 이야기 자체의 신빙성에 의문을 갖고 있으나, 하나의 방증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생」에는 이 회의의 내용에 대해 ‘협의회는 수령님께 기쁨만을 드린 것은 아니였다. 일부 일군들은 일을 쓰게 하지 못하여 그이(김정일)의 가슴을 아프게 해 드렸다'(386쪽)고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으나, 필자의 이전 논문에서도 소개한 바대로 ‘에피소드 김일성 최후의 나날’의 기술과 일치한다. 전술한 바의 내용도 포함해서 이 회의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토론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닐까. 「영생」에서 김일성이 사망하기 직전 마지막에 기술되고 있는 시간은 7월 7일 오후10시를 지나 김정일과의 전화를 끝낼 때이다. 이 때 김정일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이 책에서는) 서술되고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묘향산의 별장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이전에 김일성은 비서더러 쉬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누가 곁에 있어서 벌써 창백하게 변해진 그이의 얼굴모습을 발견이라도 했다면? 허나 그이께서는 혼자 계시였다'(402쪽)라고 되어 있는데, 이대로라면 김일성은 죽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혼자 방치되어 있었던 셈이 된다.

사망 다음날인 7월9일에 발표된 ‘의학적 결론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는 심장혈관의 동맥경화로 치료를 받아오시였다. 거듭된 정신적 과로에 의해 1994년 7월 7일 격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였다. 즉시 모든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증악되여 1994년 7월 8일 오전 2시에 돌아가시였다. 1994년 7월 9일에 일어난 병리해부검사로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영생」의 기술과 의학적 결론서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도대체 ‘혼자 계시였다’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럽다. 또한 7월8일 밤의 시점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생명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고 달려가신 지난밤'(405쪽)이라 되어 있는데, 이 서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김정일은 전화를 끝낸 직후 곧 김일성 위독의 통보를 받고 묘향산으로 향한 것으로 된다. ‘어젯밤’을 확대해석 시키더라도 적어도 7월8일 새벽까지는 묘향산에 당도했을 터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7월7일 오후 (밤이라는 설도 있지만 시각은 불명함)에 요인 수송용의 헬리콥터 3기가 궂은 날씨 가운데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향한 것을 포착하고 있다. 김일성의 신체 변화가 적어도 7일 밤에 일어났다고 하면, 10시가 넘도록 전화를 하고 있었다는 「영생」의 기술과 모순이 된다. 이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지각색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적어도 김정일이 공식 문헌의 내용을 고쳐서라도 앞뒤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떤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되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5) 의학적 결론서의 개찬(改撰)

소설 「영생」에서는, ‘거듭된 정신적 과로에 의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원래 담당의가 작성한 문서에는 들어 있지 않았는데 김정일이 8일 밤에 보태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김정일은 카터 방문 때나 그 외 외국에서의 빈객들의 영접이나 경제부문 책임일꾼 협의회에도 전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여하고 있지 않았다. 모두 김일성 혼자서 대처하고 있었는데 이는 김정일이 부친의 ‘거듭된 정신적 과로’가 쌓이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 말을 보태 쓰게 한다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럽다. 더구나 사망전에는 「영생」의 어느 부분에서도 김정일이 김일성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심장에 문제가 있는 김일성의 몸을 24시간 체제로 지켜보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지자기에 대해서까지 걱정하고 있으니까). 그로 미루어 본다면 김일성의 건강을 늘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리바이 만들기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개찬(改撰)이다. 실은 개찬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영생」에 적혀 있는 ‘의학적 결론서’는 다음과 같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시였다.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였다. 즉시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증악되여 1994년 7월 8일 2시에 서거하시였다. 그 후 진행한 병리해부검사에서는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증되였다>(410쪽)

‘돌아가시였다’가 ‘서거하시였다’로 바뀌는 등 사소한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원문의 ‘즉시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심장 쇼크가 증악되어 1994년 7월 8일 오전 2시에 돌아가시였다.’의 ‘심장 쇼크가’가 삭제되어 있는 것은 사인에 대해 더 깊은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인데, 특히 '1994년 7월9일에 행해졌다’의 부분이 ‘그 후’로 되어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생」에 따르면 주치의가 ‘결론서’의 원문을 가지고 온 것은 7월8일 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부는 7월8일 중에 행해진 것으로 되며, 본래의 결론서와 모순이 된다. 「영생」에서는 8일 아침에 노동당 정치국 긴급 회의를 열어, 여기서 결론서를 발표할 것이 결정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이 회의에서 해부가 결정되었거나 아니면 김정일이 한밤중에 묘향산에 달려가 김일성 사망을 접하여 곧바로 해부를 명령했거나 한 것이 된다. 왜 신과 같은 김일성의 시체를 서둘러 해부해야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적혀 있지 않다.

어쨌든 이 하루의 차이는 몇 가지 억측을 낳는다. 우선 도대체 왜 김일성은 해부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김일성의 사체에 메스를 가하는 일이 김정일의 허가 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영생」의 기술이 사실이라면 김정일은 늘 김일성이 격무를 하고 있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누군가가 (김정일을 포함해서) 사인에 대해 의문을 느낀 것이 아니라면 새삼 해부까지 해서 사인을 조사할 필요(또한 해부했다고 해서 그 소견을 발포할 필요)는 없었을 터이다. 더구나 ‘곧바로 온갖 치료를 가했다’고 했으므로 그 시점에서 병이 무엇인가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6) 승계를 하지 않은 불명확한 이유

김일성이 죽은 후 김정일이 언제 국가주석이나 총서기를 계승하느냐 하는 문제는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영생」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을 추대하는 문제는 당의 조직적 의사이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로동계급의 수령들인 레닌이 서거하였을 때는 한 주일만에, 쓰딸린의 경우에는 그 당일날에 그리고 중국당에서는 20일만에 추대행사들이 있었다.

한순간의 정치적 ‘공백’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적용된 정치의 섭리였다. 하지만 김정일 동지께서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으신 채 문선규에게 시선을 돌리시였다.

“문선규동무에겐 무슨 문제가 또 있습니까?”

“다른 것은 더 없습니다. 조미회담문제는 이미 결론을 주신대로 외교적 경로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김학철이 쪽에 한번 시선을 주고 나서 말을 이었다.

“지금 새로 파견되는 몇 명의 대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특명전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국가수반만이 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평양에 주재할 다른 나라 대사들도 새로 임명되여 왔습니다. 그들의 신임장도 국가수반이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동무도?...”

김정일 동지께서는 놀라운 듯 문선규를 바라보시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문선규는 주저없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민심을 대변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김정일동지께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시며 머리를 저으시였다.

“우리에겐 이른바 그 정치적 공백을 메꾸는 일이 급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수령님처럼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442-3쪽)

김정일이 ‘인민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생각해봐도 부친의 지위를 계승하여 정치적 ‘공백’을 메우는 것 밖에 다른 길은 없었을(본인이 자신이 계승해서는 인민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몰라도) 터이다. 이후 김정일은 조문객을 영접하러 나가 버린다. 계승문제와 관련해서는 그 후에 (회의가) 영결식(7월19일) 전날에 열렸다(고 「영생」에는 적혀 있다). 정치국 회의의 장면에서 나오지만, 이 때도 김정일은 계승문제 논의 자체를 얼버무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감히 이 문제가 제기되고, 그것을 김정일이 자신의 의지로 차일피일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은 결국 일반에 ‘왜 계승하지 않으냐’는 의문이 퍼져 있어서, 그것에 대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소설에서도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없지만).


3. 김일성의 사망은 지금의 북한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고의였든 우발적이었든 간에 김일성의 죽음에 관해 김정일이 어떤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한다면, 김정일의 권력이 확립되어 있을 경우 자신의 권위를 부각시킴으로써 ‘이제 죽은 김일성의 시대가 아니다’라고 해 나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실은 김일성이 죽기 전에 북한의 일부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예컨대 전술한 바 ‘당 중앙위 활동개시 30주년 캠페인'. 이것은 김정일을 은근히 무시하고 친정체제를 부활시키려고 한 김일성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생각되지만, 7월6일자 「노동신문」 사설인 ‘영도자와 인민의 혼연일체한 위력을 더욱 굳세게 해 나가자’에서는 김일성이란 글자는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용되고 있는 ‘영도자’라는 말은 글 가운데서는 거의 김정일과 동의어가 되어 있다. 이것은 부자 갈등 중에서 김정일 쪽에 있는 세력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1994년 11월에는 김정일은 권력을 쟁취하지만, 20년간 후계자로 인정받고 실제로 권력을 행사해 왔던 김정일이 새삼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나타나 있다. 더구나 그 후 김정일(또한 그 측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서의 김정일이 아니라, 독립된 카리스마로서의 김정일을 내세우려고 해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생」의 한 장면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슬로건을 김정일이 제창하는 장면이 있다. 전술한 바 7월18일의 정치국회의에서 이다. 정말로 김정일이 제창했던지 안했던지 간에 김정일에 있어서 김일성이 자신과 ‘함께' 계셔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그 후 ‘총서기’가 되었지만 중앙위원회는 열리지 않았으므로 그 직명은 본래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는 비슷하나 실은 다른 ‘조선노동당총서기’이다. 더구나 국가주석은 김일성의 전매특허로 해 버리고, 자신은 최고사령관 및 국방위원장에 머물러, 헌법상의 국가원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되어 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지위를 계승하지 않은 데에는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책임있는 지위에 앉을 경우(권한을 가진 지위에는 벌써 앉아 있으나, 실패의 책임추궁을 받게 되는 지위라는 뜻) 국가 재건의 책무를 지게 된다든지, 외국 빈객들을 만나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기피하려는 것이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그야 어쨌든 그는 실질적인 최고권력자이면서도 부친의 카리스마 없이는 어떤 일을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김일성이 죽은 후 오늘날까지 논문 등을 통해 몇 번이나 개혁개방 정책을 비난하면서 한 때 ‘주체사상’이란 김일성의 이미지가 강한 말을 ‘붉은 기 사상’으로 바꿔 놓기도 해 봤지만, 김일성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김정일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일반 민중들이 달고 있는 배지는 변함이 없이 김일성 배지이다. 9억불 이상이라고 하는 방대한 돈을 들여 금수산 의사당을 김일성의 시체를 안치하는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장해야 되었던 것도 김일성의 카리스마가 김정일에게 필요불가결함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4. 김정일의 리더십과 일본의 대북정책

이러한 현황에서 볼 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김정일 체제의 안정을 전제로 한 대북정책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김정일 체제는 늘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며, 거꾸로 이것을 주변국들이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이 현재의 구도이다.

김일성 사망후 경제는 더욱 가속도적으로 악화되고 있고, 자체내 힘으로 이것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실시되고 있는 것은 강경노선에 의한 협박 외교와 자연 재해를 선전 재료로 한 원조 요청,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공갈’과 ‘등치기’이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과 미국은 이에 대응하지 못한다. 중국은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붕괴되면 한국은 흡수 통일 형태로 북한을 통째로 떠맡아야 되고, 방대한 부담을 지게 된다. 중국은 난민의 대량 유입이 예상되는 데다가 완충지대가 없어짐으로 안전보장 상의 위협을 받는다.

이런 이유들로 주변국은 북한의 현상 유지를 기대하고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일본에게도 같은 노선을 취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선은 특히 일본의 경우 납치자 구출을 보류하거나 핵미사일 개발을 방관하는 것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에, 안전보장 상 극히 해롭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서는 여당의 일부가 현재 조일 국교 정상화를 진행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식량원조가 추진되고 있다. 미국 경우 작년의 페리 보고서에 보이는 바와 같이 클린턴 정부는 김정일 체제가 안정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주한 미대사관에서 워싱턴을 향해 보낸 극비전문(월간조선 1999년 11월호에 전재되어 있음)에서는 전혀 반대로 김정일 체제가 극히 불안정하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김정일 체제가 안정되어 있다면 직접 대화를 통해 적어도 현재보다는 현안 해결에 더욱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징표는 김정일 자신이 외교무대에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체제는 불안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고, 우리 나라의 국익에서 보더라도 포스트김정일 시대까지 내다보는 대북정책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