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젊은 친구들! 고향 어귀에 비석 하나 세워 주오
4월 말경 회원 한 분이 NKnet를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최고령의 회원일 것입니다. 고희를 앞둔 이 분은 한때 친북성향의 학생운동을 했던 젊은 친구들이 북한인권운동에 나선 것이 대견해서 NKNET의 창립때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북한인권운동 관련 행사에 자주 참석하고 사무실에도 가끔 들르는 분인데 이 날은 좀 특별한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함경도에 고향을 둔 실향민입니다. 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이 나중에 내 고향에 갈 수 있거든 비석을 하나 세워 주시오. 조상님들. 미안합니다. 이 좋은 땅에서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이제는 사람도 못 살 땅으로 황폐하게 만들어 놨으니 참 미안합니다." 이렇게.

이 분의 부탁은 사뭇 진지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른바 친북학생운동의 열풍이 한창이던 1988년에 대학에 입학한 아들이 실향민 아버지의 생각에 잘 동의를 해 주지 않아서 부자의 연을 꺾기로 하고 집에서 내보냈다고 합니다. 만나지 못한 지 벌써 몇 년째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생각에도 자신의 아들은 주사파라고 할 수도 또 특별히 운동권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들 역시 당시 대학의 분위기를 이겨낼 수는 없었던가 봅니다. 어쨌든 이 연로한 회원은 평생에 두 번의 이산의 아픔을 치른 셈입니다. 전쟁 때 어머니를 두고 남으로 내려온 그가 이제는 하나뿐인 아들을 내쳐야 할 만큼 북한체제에 대한 그의 혐오는 치열했습니다.

정상회담을 한다는 이 국면에서도 그는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합니다. 편집자는 하필 남북정상회담에 한껏 들뜬 이 즈음에 비석을 부탁하러 온 그의 내면에서 한량없는 쓸쓸함을 읽었습니다. 어쩌면 이 분은 아들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는 어렵겠으니 대신 비석을 세워달라는 것이나 아들과의 재회는 기약할 수 없으니 아들같은 젊은이들이 그 일을 해 달라는 것이나 모두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아들과 화해하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상회담은 그렇게 이 이산가족의 아주 은밀한 바람을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특히 북한을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알아왔던 우리들은 정상회담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죽음의 댓가로 북한 정권담당자들도 뭔가 각성을 하게 된 것은 아닌가 잠시라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남북정상회담은 초유의 일일뿐더러 남북이 화해로 가는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 깊숙이 숨어 있는 의심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은 북한정권이 정말이지 민족화해를 할 의사가 있는가 하는 것이며, 또한 자신들의 체제를 세계무대에 당당히 공개할 용기가 있는가이며, 더욱 준엄한 것은 예상되는 정권위기의 부담을 지고서라도 인민을 위해서 개방을 택할 만한 선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당장 이산가족상봉부터 시원하게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북으로 가는 뱃길이 열리고 항공로가 열릴 것같은 들뜬 분위기에서 참담하게도 살아 생전에 고향에는 못 가 보리라는 실향민들의 절망에 대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남북정상회담은 참으로 기대되는 사건이긴 하지만 이 사건의 전에도 후에도 초연한 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번 호 박상봉씨의 “연초의 국경 기행”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도 국경을 처참하게 떠도는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일단 잡히면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으로 송환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에 대해 최소한 동정이라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지난 호에 이어 두 번째로 내보내는 보위부 지하감옥 체험자의 증언을 다른쪽 귀로 흘러보내야 옳은 일입니까? 당국간 대화가 진행되는 것이 인권문제에 침묵할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프랑스에서 북한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어떤 이가 탈북자 한 분을 인권위원회에 초대했더니 남한 당국이 출국을 금지시키더라면서 이런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허탈해 합니다. 인권 유린이 현재진행형이라면 북한 인권을 향한 목소리는 어떤 순간에도 잠재워서는 안 됩니다. 남북정상회담이 목표로 하는 민족화해란 한반도 평화와 7천만 남북한 주민의 인간적 존엄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현실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화해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