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라진 사람과 잊혀진 책
이한영/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동아일보사 1996)


1997년 2월 15일, 한 젊은 남자가 두 명의 괴한(김정일이 보낸 공작원으로 밝혀짐)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공화국을 배반한 죄'로 쓰러졌다. 같은 해 체포된 남파간첩 최정남에 의해 그 괴한은 김정일이 보낸 북한공작원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비극에 중요한 원인이 된 책이 있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 그것이다. 이 책은 비밀에 휩싸여 있던 김정일 왕가의 '깊은 곳 깊은 시간'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기술하고 있다. 놀랄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이렇게 편안하게 기술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그곳에서 일상을 함께 누린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제3의 관찰자라면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해석을 가미해 보려 했겠지만 이 책의 저자 이한영(본명 리일남)에게는 1백만 달러어치의 생일선물을 받는 김정일의 아들 정남이가 크는 과정도, 꽃같은 처녀만 뽑아 기쁨조로 삼는 김정일의 행각도 그리 요란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이모부인 김정일에게 한량없는 혜택도 입었던 터라 거듭 밝히고 있듯 김정일에게 사적인 원한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일의 첫 아들을 낳은 이모 성혜림 덕분에 이한영은 로얄 패밀리의 자제에게만 주어진 특권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던 것, 모스크바에 유학했고,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던 국가에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김정일의 덕택이었다.

이 책을 읽는데는 크게 세 가지 독법(讀法)을 추천할 만하다.

첫째, TV의 역사드라마(史劇)를 보는 태도로 읽을 수 있다. [용의 눈물]이나 [장록수], [장희빈], [연산군] 등의 사극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바로잡기 위한다는 명분 아래 형제까지도 단칼에 베어버리는 장면을 전율로 지켜보지만 특별한 분노를 느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동시대의 일이 아닌 먼 과거의 일일 뿐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이런 일이 재현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동강 로열패밀리]의 장면 장면도 사극을 보는 기분으로라면 상당히 흥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왕과 후궁, 왕세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권력다툼과 세도, 질투, 파탈(擺脫), 잔인과 과도함을 사극에서 얼마든지 보아왔던 경험이 있으므로 김정일의 관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도 봉건왕조의 별당쯤의 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로 저자 이한영의 운명에 포커스를 두고 읽는 방법이 있다. 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에 함께 근무했던 아버지 이태순, 어머니 성혜랑, 로동신문 국제부장을 지낸 외할머니 김원주, 선교피복공장 지배인을 했던 할아버지 성유경.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이한영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전환 국면을 맞은 것은 출가하여 딸을 두고 있었던 이모 성혜림(전직 배우)이 김정일과 맺어지면서였다. 이모가 살고 있던 관저에 김정일의 아들 정남이의 말벗이 되어 함께 살면서 그는 북한에서 누구도 누릴 수 없는 특혜를 받으며 자란다.

후에 이모 성혜림이 모스크바로 이주할 때 함께 가서 이한영은 북한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자본주의'에 심취하면서 이한영은 아무런 불편없는 북한 로열패밀리의 지위를 버리고 한국으로 오게 된다. 애초의 이유는 대단한 나라로만 여겨졌던 미국에 한 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스 주재 한국 대사관에 갔고 요원들은 그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그는 한국에 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에 다녔고, KBS의 PD로 일했으며, 올림픽 때는 러시아어 통역사로도 활약했다. 아름다운 부인과 결혼을 해서 예쁜 딸도 낳았고 사업으로 성공도 실패도 맛보았다. 화려한 저택에서 살아도 보고 사기죄로 고소 당해 감옥살이도 해보았다. 그러나 북한에서 한국의 재벌도 감히 누려보지 못할 호사를 경험했던 그에게 한국생활에 연착륙하기란 거의 기적인 듯 어려웠다. 그리고 어느 날 언론사에 자신의 숨겨둔 북한정보를 놓고 거래를 했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덮여 있던 과거와, 모스크바에서 망명을 기도하려던 그의 어머니와 이모의 인생까지 넝쿨처럼 딸려 나왔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는 피살당했다. 그때 그는 36세였다.

그의 인생이야기는 도무지 평범한 구석이 없다. 그러나 그가 김정일의 밀실을 공개하고 난 뒤 처참하게 죽었을 때 다시 모든 것이 현실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면 언제나 소탈한 인민복을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나는 김정일의 모습에서 '어쩌면 그 자신도 혁명적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인민들과 함께 고난받고 있다'고 착각할 뻔한 게 아닌가. 과장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라는 우울한 드라마를 남기고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이한영. 그의 증언은 사람은 없어지고, 책도 거의 잊혀졌지만 어쩌면 새록새록 그 가치를 발하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인 김정일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그러나 역시 이 책은 '민주주의자'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을 하늘로부터 받아 태어났음을 믿고, 그리하여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간단한 명제만 기억하고 있어도 우리의 '분노'는 시작된다. 한 사람의 주인을 위해 만인이 봉사해야 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파국적 현실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 북한이 겪고 있는 고난의 원인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오늘 북한, 통일, 대북정책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김정일'의 내면, 취향, 속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면 곤란한 일이다. 이 책은 이한영의 암살이 보증해 준 것처럼 김정일의 중요한 단면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가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던 북한 사람들이 궁색한 표정으로 우리 앞에 속속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사극을 보는 여유를 갖고 김정일의 파탈을 지켜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사극을 보듯이 읽으라고 권했던 첫 번째 독법과 한 젊은이의 가련한 운명을 중심으로 보라고 했던 두 번째의 독법보다 우리들 자신이 '민주주의자'로 무장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세 번째로 추천했던 독법을 거듭 강권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