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체제의 모순과 북한사회 민주화의 전망(2)
-북한의 연착륙은 가능한가

북한사회의 변화 경로

북한의 현 집산주의적 전제체제가 안고 있는 비효율성과 비민주성은 새삼 말할 것이 못된다. 이 체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논란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북한사회의 변화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데 있다.

논리적으로 북한사회의 변화 경로는 크게 세 갈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베트남이나 중국처럼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집권층 스스로가 개혁개방을 추진해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높여나가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남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비용이 적게 들고 혼란도 적은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둘째는 현 집권층이 권력의 약화와 동요가능성을 우려해 대규모적인 개혁과 개방을 피하면서 극히 피상적인 정책의 조정만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는 단기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정권과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세 번째는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억눌려 있던 민중의 요구가 분출해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정권과 체제가 붕괴되는 길이다. 두 번째는 루마니아가 밟았던 길이고 세 번째는 고르바초프 시절 소련이 겪었던 운명이다.

북한사회의 변화가 첫 번째 형태로 진행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연착륙론이다. '연착륙(soft landing)'이란 북한의 집산주의 체제가 급격히 붕괴되지 않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만일 이러한 형태의 변화가 가능하다면 남북관계의 변화로 연결되어 남북 사이의 첨예한 대립은 종식되고 화해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에 반해 경착륙(hard landing)은 북한체제가 중앙통제력을 잃고 커다란 혼란에 빠져 궁극적으로는 남한과의 충돌 혹은 체제의 급격한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나 세 번째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북한이 연착륙에 실패하고 붕괴될 경우의 혼란을 감안할 때 북한의 현 집권층 스스로가 더 이상 실패한 체제를 고집하지 않고 개혁개방 정책을 펴준다면 이는 남북한 모두를 위해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우리의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데 있다.

북한의 연착륙이 가능하다는 견해는 중요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북한의 현 집권층이 개혁개방노선을 택하지 못하고 있는 주된 요인이 남한이나 미국 등 주변국가의 북한에 대한 위협과 봉쇄-그리고 이에 대한 북한 정권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주변국들이 북한에 대한 위협을 중단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면 북한의 현 집권세력이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성공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북한의 연착륙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남한과 미국 등이 적극적으로 김정일 정권을 지원하고 김정일이 정권유지에 자신감을 갖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게 해준다면 현 체제로는 장기적인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아는 김정일 정권이 남한이나 미국 등과 화해하고 국제적인 지원을 이용해 점진적으로 북한사회를 개혁해 가리라는 것이다.

연착륙이 불가능한 이유

그러나 이것은 관념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김정일 정권이 외부의 지원하에 사회를 개방하고 개혁하는 경우를 상정해 보자. 이 경우 외부세계 특히 남한사회의 실상에 대한 정보가 북한 주민들에게 스며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북한 정권은 사상·정보통제와 비밀경찰기구를 통한 감시를 체제유지의 기본축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개혁개방을 시작하면 이 두 축 가운데 하나가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 정권에 대한 저항이 극렬해지면 비밀경찰기구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북한 정권이 개혁개방을 통해 주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켜주는데 걸릴 시간과 외부로부터의 정보유입으로 북한 주민들 사이에 정권과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형성되는데 걸릴 시간 중 어느 것이 더 짧을까? 더구나 북한의 현 집권층은 북한 주민들에 대해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왔다. 권력의 통제를 완화하는 개혁을 시작하면 주민들은 권력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들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곧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대규모적인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이렇게 하여 김정일 정권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후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주민들 사이에 반체제 세력이 강력하게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북한 주민들의 눈에는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와 대비되는 발전된 모델로 보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들은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을 향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바로 눈앞에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사회가 있는데 어떤 북한주민이 남한으로의 통합을 마다하고 수십년 걸릴 북한사회의 건설에 생을 바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남한사회가 서독에 비해 뒤떨어진 사회이므로 북한주민들의 남한으로의 경사가 그렇게 극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동서독 사이의 격차에 비해 남북한 사이의 격차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은 무시한 단순한 생각이다. 동독주민들이 서독사회를 보고 받은 충격보다 북한주민들이 남한사회를 보고 받을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성균관대 박광작 교수는 한 논문{박광작, '남북한 경제, 사회 통합의 문제와 통합에 대비한 경제, 사회보장정책 방안', [21세기 한국경제의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안석교 편, 나남출판사, 1996년) 320p. 참조.}에서 남북한의 초기 소득격차를 100:15로 가정하고 북한이 남한보다 매년 10% 포인트만큼 더 높은 성장률로 성장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 가정을 할 경우에도 북한과 남한의 1인당 소득이 같아지는데는 19년이 걸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남북한 주민 1인당 소득의 격차는 이보다 훨씬 크다. 북한은 유엔에 낸 보고서에서 95년의 1인당 소득을 239달러로 보고했다. 이런 조건에서 북한의 개혁개방은 경제적 성과를 내기 전에 정치적 동요를 먼저 초래해 결국 북한 정권과 체제, 그리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붕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북한 체제의 동요는 남한이나 미국 등 외부의 대북 적대정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북한 주민들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남북한 사회의 비교로부터 초래되는 것이다. 앞서 든 랜드연구소의 보고서는 이와 관련해, 북한의 "불안정은 외부세계의 선호(preferences)나 정책들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동학(dynamics)을 따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하고 있다. 보고서는, 많은 관측통들이 북한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피하려면 궁극적으로 개혁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북한이 고장난 경제를 되살릴 필요성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현재의 권력이 체제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의미있는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정일 정권의 생존전략-Muddling Through

이 점과 관련해서 김정일 정권은 개혁개방에 뒤따를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북한사회 생존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개혁개방노선을 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김정일이 택한 생존방식은 이른바 "muddling through" 정책-즉 그럭저럭 근근히 버텨가는 정책-이다. 이것은 내부적으로는 개혁을 거부하고 정치적 억압과 집산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체제유지에 필요한 경제적 자원은 대량파괴무기를 위협수단으로 삼아 주변국들로부터 갈취하는 전략이다. 물론 이 경우 경제의 발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갈취한 자원은 주로 군사력의 유지·증강과 지배계급의 결속력을 유지하는데 이용될 것이고 일반 주민들은 기아상황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제로 북한 당국이 외부로부터의 인도주의적 지원물자를 이를 필요로 하는 일반주민들에게 제대로 분배해주지 않고 정권과 체제유지에 필요한 부문에 우선적으로 배분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있다. 북한에서 활동해온 국제적인 민간구호단체들이 이와 관련하여 북한 당국을 비난하면서 연이어 철수하고 있는 것이다. 98년 '국경없는 의사회'(99년 노벨 평화상 수상단체)와 '세계의사회', 99년 12월 'OXFAM' 등의 국제구호단체가 북한을 철수하면서 원조물자의 사용처가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는 3월 9일 프랑스의 민간 구호기관인 '기아추방행동(ACF)'이 같은 이유로 북한 당국을 비난하며 철수했다. 이 단체의 로제 고디노 회장은 "북한에서 진정한 의미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북한은 매년 유엔 기관들로부터 100만t의 식량을 지원받고 있으나 원조 식량이 일단 정부로 넘어가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나머지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3월 13일에는 영국의 국제구호단체인 기아방지행동(AAH)이 전 직원을 북한에서 철수시켰다. AAH는 북한 원조 프로그램를 효과적으로 모니터하고, 구호품에 대한 부정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기회를 요구하며 북한 당국과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돼 전 직원이 철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고 밝히면서, "인도적인 개입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 원칙조차 준수될 수 없는 곳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하느니 철수하는 편이 낫다고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김정일 정권의 기본생존전략은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사회를 정상적인 발전의 궤도로 진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일반주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현재의 전근대적인 체제를 유지해 가는 것이다. 그것만이 -결국은 이것도 한시적인 효력밖에는 없겠지만- 김정일 자신의 권력과 생명을 보존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