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 in SK Interview: 북한의 식량문제 해결에 청춘을 바친 농생물학자 이민복씨
{수퍼옥수수 정도는 1970년대에 이미 북한에서 개발완료되었다. 북한의 식량문제가 종자나 비료가 없어서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무엇보다 북한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무시다. 나는 김책공대 반도체공학부에 입학했다가 김일성의 [쌀은 공산주의]라는 한 마디에 그만 두고 청춘을 온통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바쳤다. 그러나 식량문제의 근원은 딴 데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과학자의 양심으로, 그리고 농민들 속에서 몸으로 체험했다. 북한의 기술수준이나 북한주민의 능력을 문제삼기 전에 그들을 전락시키고 굶주림에 죽어가게 만드는 근원을 직시해야 한다.}

이민복씨는 195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북한 김책공대와 남포농업대학을 다녔고 대학검정시험으로 졸업했다. 과학원 '강냉이연구소' 연구사를 역임, 북한의 식량문제해결을 위해 애쓰다가 1991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1995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현재 삼육대 통일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며 KDI전문위원, 중앙일보 자문위원 등의 직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유가 최고의 직장'이라고 말하는 그는 현재 자유북한인협회 대변인으로서 탈북자의 인권과 통일준비를 위해 일하고 있다.

'쌀은 공산주의'라는 수령의 한 마디

1995년 2월 한국으로 들어와 정착한 지 만 5년을 넘긴 이민복(43)씨. 지난 3월 초 싱싱한 귤 한 봉지를 들고 Keys를 찾아왔다. 신고간난(辛苦艱難)의 인생을 겪어왔음에도 점잖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이 중년의 신사도 세월을 잘 못 만났기는 다른 탈북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자신이 공화국에 살아가는 보람이자 생애를 걸어도 좋은 책무라고 여겼던 북한의 식량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저는 북한에서 말 그대로 담배니 술이니 여자니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충성분자 그 자체였습니다."

평남고등중학교(남한의 고등학교) 시절 이씨는 앞으로는 전자공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 졸업 후 김책공업대학(이공계의 명문대학) 반도체공학부(74학번)에 입학했다. 1974년 그 해 김일성은 '쌀은 곧 공산주의'라는 유명한 교시를 내린다. 레닌의 '전기는 곧 공산주의'라는 말을 본 딴 것으로 쌀의 중요성을 강조한 설득력 있는 비유였던 것이다. 이 말은 전자공학자가 되리라는 이씨의 결심을 돌려 농업분야로 진로를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순천농업전문학교로, 다시 남포농업대학으로 옮겨 오로지 농업생물학자 한 길을 고집했다.

대학연구소에서 간석지 벼재배 연구에서부터 최첨단 유전자 세포공학 등을 연구하다가 수준을 높여 과학원(한국의 KAIST)으로 다시 옮겨갔다. 북한에서는 가장 큰 농업 관련 연구소인 과학원 소속 '강냉이 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연구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북한 최초로 낱알을 심는 대신 꽃가루로 배양하여 옥수수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또 하나 자랑할 만한 성과는 옥수수의 암이라고 할 수 있는 깜부기병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977년경부터 북한 전역에 깜부기병이 심각해져서 골치를 앓았다. 토양균이 뿌리를 통해 들어가서 발생하는 깜부기병은 농약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엄청난 토양을 모두 소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다. 병에 잘 견디는 종자를 개발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옥수수에 관한 한 북한이 월등한 기술 보유

"김순권 박사가 수퍼옥수수를 개발했다고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옥수수는 이북이 훨씬 앞서 있습니다. 남한에는 다 해 봐야 연구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 북한에는 옥수수가 주식입니다. 수백명의 연구자가 있단 말입니다. 수퍼옥수수 정도는 1970년대에 이미 개발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옥수수를 한 헥타르 당 16톤 수확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런 종자를 1980년대 말에 개발 성공했거든요. 10년에서 15년 앞서 있었다는 말이지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 문제의 소재는 딴 데 있었다.

"종자를 개발해서 협동농장에 주면 효과가 안 난단 말입니다. 남한 농민들은 신품종이 개발되면 95% 이상의 효과를 얻는데 북한은 20-30%도 안 납니다."

처음에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일단 농민들 속에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오지에 속하는 압록강변 양강도 김정숙군을 택했다. 오로지 충성심으로 '어버이 수령님' 부인의 이름을 딴 농촌에 가서 고생을 무릅쓰고 농민들과 함께 살아가 보리라 해서 지원한 것이다.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일념이었으므로 6년여를 그곳에서 지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음이 왔다.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구나. 이것이 식량난의 원인이로구나. 중국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 빼고 대부분이 잘 살고 있다. 개인농을 해야 한다. 집단농보다 개인농을 택하면 3-5배는 수확량이 뛸 수 있다."

생물학자 이민복씨의 인생은 이 깨달음이 있고 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도 될 것 같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난 후 그에게는 식량난의 획기적인 개선을 위해 이 방법을 택해야 함을 수령에게 알려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가족들이 말렸지만 그는 결국 개인농을 하지 않으면 북한의 식량난은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1호 편지'(김父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일컬음)를 중앙당에 올려보냈다. 자신의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에 이씨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 5월 30일!

1985년부터 식량난 구체적으로 감지되기 시작

이씨의 설명에 따르면 1990년은 북한의 식량 문제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본격적으로 식량난이 시작되었다면 1985년입니다. 그 전에는 모자란다고는 하지만 배급일자를 틀리게 준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때부터는 하루, 이틀씩 밀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위에서 잘라먹은 건 아닙니다. 그러더니 자꾸 날이 밀리고 석 달 다섯 달씩 밀리기 시작했죠. 결정적으로 위에서 노골적으로 잘라먹기까지 한 것은 1990년 들어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대량으로 굶어죽는 사태까지 온 것이죠."

수령과 당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지상과제인 식량문제 해결에 생을 걸었던 충성분자 이민복씨는 이때쯤에는 이미 마음이 다급해져 있었다. 비장한 결심으로 1호편지를 내고 반응을 기다리는데 견디기 힘든 심적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대체로 중앙당에 편지를 올려 보내면 한 달 안에 반응이 오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달, 두 달, 석 달이 가도 소식이 없었다. 넉달째에 접어든 어느 날 서면의 답변 대신 과학원의 과학지도국장이 직접 내려왔다. 그리고 이런 요지의 말을 전해 주었다.

"우리는 신중하게 당신의 편지를 검토했다. 그리고 당신의 행적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알아봤다. 당신의 그동안의 노고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도 당신 얘기가 옳다는 것을 안다. 수령님도 다 안다. 그런데 왜 하지 않겠는가. 그건 정치다. 당신은 과학만 해라. 정치 잘 못 했다가는 죽는다."

이건 상당한 배려였다. 중앙당에서는 수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도원은 이씨에게 '당신은 과학자로서 획득한 발명증이 있으니까 그럭저럭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타이르고 떠났다.

"이 때부터 나는 인생의 목적을 잃어 버렸습니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사람이 왜 자살을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회의에 빠져 있던 중 어느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로지 조국에 대한 일념으로 살아왔는데 더 이상 조국에 희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남조선도 조국이다. 그곳에는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한에 대한 한정된 정보를 다시 분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만일 북한 대학생이 임수경처럼 남으로 갔다면

"임수경이 왔다 갔잖아요. 판문점에서 잡아가는 걸 보고 저도 분노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북한 기자들이 불시에 임수경이 집에 가서 취재하는 것을 보고, 감옥에서 글도 쓰고, 항의도 하는 걸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어땠을까. 북한 학생이 허락없이 남한에 갔다가 판문점을 통해서 돌아온다면......아 확실히 여기보다는 자유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또 노동신문에서 남한은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도 가장 못사는 나라라고 악선전을 하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놓았더군요. 제가 다른 나라는 몰라도 생물학을 하면서 일본책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었어요. 한 달 노동자 월급으로 제일 싼 차를 한 대 살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노동신문에 남조선은 일본의 8분의 1수준이라고 해 놨더군요. 그렇다면 8달 월급을 모으면 차 한 대를 산다는 말 아닌가. 깜짝 놀라고 말았죠. 북한에서는 평생을 모아도 자전거 한 대 살까말까란 말입니다. 대구의 섬유산업이 망해서 부도액이 100억이라는 등 북한에서 제공하는 정보로도 충분히 남한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되더군요. 재벌도 아닌 섬유업자가 100억을 부도낼 수 있는 나라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의 남한행은 이렇게 충분한 조사와 분석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다.

"나야 그곳에 살아야 할 이유를 잃었지만 가족을 어떻게 할까 몹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북한법을 뒤져보기 시작했죠. 방법이 생기더군요. 이혼을 하고 행방불명된 후 고발하도록 만들면 처벌을 피할 수 있었어요. 제가 소속된 연구기관의 상사들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신이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연구소로 전근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모든 서류를 구비해서 이동이 확정된 후에 떠나게 되면 前 근무지의 상사는 일단 책임을 면하고 新 근무지의 상사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1990년 11월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단 하루만에 잡혀 다시 북으로 송환된다.

외국에서 잡혀 들어오면 최소 3년형이었지만 다행히 하루만에 잡혔던 터라 중국의 농업을 보러 갔다는 말을 믿어주었고 그 동안의 그의 실적을 평가한 때문인지 석달만에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또 다시 탈출하여 95년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 중국과 러시아땅을 전전했다.

"온갖 천대를 받으면서 중국땅을 헤매면서도 마음만은 희망에 넘쳤습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 한국대사관이 없어 3일을 헤엄쳐 소련으로 건너갔죠. 극한 상황에서는 기적을 보게 되더군요. 그런데 목숨을 걸고 찾아간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에서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탈북자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바로 통일정책

"우여곡절 끝에 최초로 유엔 난민 판정을 받고 남한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서 나를 조사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처음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와 꼭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루밤을 쉬지도 않고 날아온 사람에게 온갖 상스러운 욕에 발길질까지 하면서 '가족 버리고 온 놈' '인간쓰레기'...... 밥 얻어 먹으러 온 거지 취급이더군요."

이씨는 수사관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간첩이라는 의심이 갈지언정 냉정하게 할 수 있다. 당신들은 북한사람을 우습게 보지 마라. 나는 통일을 위해서 왔다."

-먼저 북한에서 투쟁할 생각을 했어야 하지 않는가?

"여기 온 것이 가장 힘든 투쟁이다. 당신이라면 과연 사선을 넘을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로 온 것이 비겁한 행동이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는가?

"20만을 수용하고 있는 정치범 수용소가 그 증거다. 여기서는 돌을 만 개 던져도 죽지 않지만 거기서는 말 한 마디로 수용소에 간다."

그는 정부 차원에서의 통일에 대한 적절한 대비도 없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예 통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기만 한 이곳의 현실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했다.

"탈북자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통일정책의 시작입니다. 각자의 자질을 잘 심사해서 적절한 일자리를 찾아주어야 합니다. 학위가 없다고요? 최고의 지식이 경험입니다. 북한으로 넘어오는 삐라를 보면 월드컵, 헹가레 등 북한 사람들이 못알아 듣는 영어가 가득합니다. 미국 심리전 학교를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해서 북한 사람들을 바꿀 수 있습니까? 오히려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라는 믿음만 더 강하게 할 따름입니다. 이런 부분은 탈북자들이 도울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탈북자 관리기관만 가득할 뿐 기껏 몇 백 명도 되지 않는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는 시스템도 비전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북한으로 탈출하는 사람까지 생기지 않습니까?"

탈북자들에 대한 호된 비판도 잊지 않았다.

"당국자들의 고충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북한 사람들은 증오와 비판을 일상적으로 배워온 탓에 남 헐뜯는 것이 습성처럼 되어 있습니다. 나만 해도 곁에 가기 싫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인성을 회복시켜 줘야 합니다. 물론 스스로도 노력해야 하고 먼저 온 탈북자들도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민복씨는 갖가지 직함을 갖고 있었다. KDI전문위원, 자유북한인협회 대변인, 북한인권시민연합 집행위원, 중앙일보 자문위원 등 그 많은 직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희대 통일대학원에 나가는 것 말고 일정한 직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저는 다시 농촌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 구상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自由가 최고의 직장이지요."

이민복씨가 가르쳐주는 인간학-균형감각을 찾아서

치밀하게 사고하는 과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이민복씨의 남한과 북한은 모두 흠도 티도 참으로 많다. 그는 "그래도 이곳에는 희망이 있다. 평양의 거리에는 80% 일제 자동차가 다니는데 이곳에서는 외국차를 구경하기 힘들다. 주체는 오히려 여기에 더 있다" 면서 "한쪽이라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고 안도했다. 그러나 조국, 민족, 인민, 혁명, 통일 등의 '빛나는' 상징으로부터 힘을 내고 전신을 기울여 살아왔던 북한에서의 삶은 온통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잘못된 인생이었던가? 북한사람들은 겉으로는 모르지만 속으로는 이 물음에 쉽게 '예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크고 위대한 것, 영웅적이고 숭고한 것'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이 있다. 이 지향을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고귀함을 인식한다. 그래서 인간은 입고 먹을 것이 풍부해도 자살할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북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쳐온 이런 상징들이 수령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해 조작되고 악용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민복씨가 비판한 대로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믿음만 강화시켜 주는 삐라'들에는 북한사람들의 내면에 대한 고려가 없다. 또 다른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발가벗은 여자의 사진을 박아넣은 삐라도 북한군인들에게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그런 삐라들을 통해 본능을 자극 받기에는 그들은 너무도 잘 사상적으로 무장되어 있다.

북한사람들에게 남한이 소중한 것은 먹을 것이 있고, 욕망의 통제를 덜 받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숭상해 왔던 그 어떤 영웅의 이미지보다 더 숭고한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타인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야 될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북한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될 부패와 타락, 팍팍한 생활과 스트레스보다 더 꿋꿋하게 이들 가치가 버티고 있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