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숭고와 환멸의 북한사
사람은 산을 삼킬 듯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앞에서, 폭풍우가 뒤흔드는 대지 위에서 감히 인간이 범접 못할 위대한 자연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이럴 때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 '숭고'(崇高)라는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사람으로부터도 숭고의 감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기개와 용기가 넘치는 영웅 앞에서, 지고의 선(善)을 실천하고 떠나는 사람 앞에서 우리 소박한 인간들은 기꺼이 '숭고한 존재'라는 헌사를 바치기도 합니다. 조국과 민족, 국가와 인류, 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숭고한 뜻을 위하여 목숨조차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북한체제가 놀라운 내구력을 발휘해 온 것에는 '숭고한 이미지'를 조작해 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국, 민족, 통일, 사회주의, 주체, 혁명, 인민, 사상, 당...그리고 역시 이 모든 것의 상위에 존재하는 절대자 '수령.'우리가 흔히 '간첩'이라고 부르는 북한 공작원 중에는 '나는 간첩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혁명가였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총련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북한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재일교포 장용학씨는 최근에 펴낸 저서 [조총련 공작원]이라는 책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Keys가 만난 이민복씨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수령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일했고, 그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는 생각에 의심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그 일이 불가능해졌을 때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얼마 전 북한 노동당출판사가 출간한 '인민군대를 강화하며 군사를 중시하는 사회적 기풍을 세울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비밀 문서가 제 3국을 통해 작성된 지 1년여만에 입수되었습니다. 이 문서에서 김정일은 "제국주의자들은 반사회주의 책동을 더욱 악랄하게 벌이면서 퇴폐적인 부르조아 사상을 퍼뜨리려 하고 있으며 남조선 당국자들은 미리전부터 꿈꾸어 오던 흡수통일을 또 다시 꿈꾸면서 교류의 간판 밑에 공화국 북반부에 부르주아 자유화 바람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에 대해) 민족주의자며 애국주의자라고 하면서 수령님께서 생전에 치하의 말씀이 계셨는데 대해(大海)같은 그이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믿음에 오늘날 배신으로서 대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정일이 자신이야말로 '민족주의와 애국, 사랑과 배려, 동지적 믿음'의 편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고 정말로 믿고 있다면 낭패입니다. 이 모든 숭고한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해 수용소와 지하감옥을 만들고, 비밀경찰을 유지하고, 주민을 통제하는 것이라면, 사람을 공개총살하고 화형, 교수형, 건형 등으로 죽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사람이 굶어죽든 맞아죽든 그 자신이 홀로 '숭고한 것'을 지켜내는 외로운 영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를 설득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Keys는 이번 호 목격자통신을 통해 북한 국가보위부 감옥의 현실과 공개처형에 대해 전합니다. 소름끼치는 증언을 들으면서 북한의 악랄한 사형집행자들이 정말로 공화국의 위대한 명분을 위해서 기꺼이 '반혁명분자' '반당분자' '반국가분자'를 처형한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말 그대로 숭고한 위업을 위해 못할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사람들과 토론이나 논쟁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봐! 김정일. 당신이 그렇게 강조하는 민족이 무엇인가. 굶어 죽고, 사지를 헤매는 사람들은 민족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렇게 해서 설득될 일이 아니겠지요.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 모든 화려한 명분이 사실은 단 한사람, 소위 수령이라는 조작된 상징을 위한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짐작되는 바 있습니다. 모든 숭고한 것에 대해서는 '숭배' 이전에 질문이 필요합니다. 반짝이는 것은 다 황금이 아닙니다. 따져봐야 합니다. 모든 회의와 질문이 끝난 자리에서도 여전히 가치있게 남는 것에 대해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그 어떤 것에도 우선하는 가치를 갖고 있고,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며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숭고한 이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에 와서 심히 걱정되는 것은 신비가 벗겨지고 난 다음에 오는 격렬한 환멸입니다. 환멸이 동반하는 증오는 피의 역사를 부릅니다. 우리는 북한사람들이 수령체제에 대한 환멸 뒤에 증오 대신 사랑과 정의를 배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로 이 이름으로 김정일을 단죄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