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iw: 깊디깊은 평양의 밤에도 빛은 있었던 것을!
깊디깊은 평양의 밤에도 빛은 있었던 것을!

이영화 / [북한비밀집회의 밤] (문예춘추 1996)


저자 이영화씨는 스스로도 말하지만 괴짜스러운 데가 있다. 1991년 4월부터 12월까지 북한에서 값비싼 자비유학을 하고 돌아온 재일북한인 제 1호다. 마이니찌신문(1991년 3월 19일자)이 파안대소하는 이씨의 사진과 함께 이 희귀한 사건을 보도한 적도 있다. 그가 나중에 더욱 뼈저리게 안 사실이지만 지인들이 한사코 뜯어말리는 북한유학을 단행하는 데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 필요했다. 조국 북한이 어떤 경제전망과 발상을 갖고 있는지 몸소 체험하겠다는 것, 북한에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나고 돌아오겠다는 것이 유학 목적이었는데 후에 그는 대학연구자로서는 유학의 성과가 거의 없었다고 고백한다. 애초에 북한사회과학원에서 유학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값비싼 호텔에서 교수들의 출장강의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도착 직후 연일 베풀어지는 환영파티의 결제대금이 고스라니 자신의 몫으로 돌아왔던 것, 안내원 제임스 본드(이봉도)가 수시로 값비싼 맥주와 마일드세븐을 요구했던 것, 40만엔에 달하는 한달 호텔숙박비 등 상식 이상의 유학비용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상시적인 도청과 안내원의 감시,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까지 유해도서 취급으로 대출금지되어 있고 복사도 할 수 없는 도서관, 말하자면 극단적 비밀주의로 정확한 경제정보나 자료를 얻는 것은 오히려 현지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북한에 관해서는 많이 배웠다고 한다. 이론과 책의 세계가 아닌 현장의 필드워크가 경제학자 이영화 교수를 오늘의 북한민주화운동가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현재 동경과 오사카에 지부를 두고 있는 RENK(구출! 북한민중/ 긴급행동 네트워크)의 아이디어맨 이영화 사무국장은 명실공히 행동파적 북한인권운동가다. 1998년 RENK 요원이 북한에서 직접 찍어온 ‘꽃제비의 절규-몰래카메라로 엿본 북한’은 유럽사회에 북한인권의 심각성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에 앞서 1997년 4월, 북한으로 출항하는 화물여객선 ‘만경봉 92' 호에 대해 모터 보트로 육박해서 해상 데모를 전개했던 것이나 1998년 7월 26일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의 투표일에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서기에 대항해서 이영화 사무국장을 대립후보로 모의투표를 감행했던 것은 RENK라는 NGO가 가진 매력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영화씨의 행동주의적 북한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책 ‘북한비밀집회의 밤' 제 6장 ‘비밀집회로의 초대-심야의 아파트에서 무슨 말이 오갔을까’에 해답이 들어 있다. 이씨는 안내원이나 평양사람들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한 북한 체재 5개월쯤 어떤 비밀집회에 초대된다. 이 비밀집회에 참가한 경험은 이씨의 유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할 뿐더러 향후 그의 행동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었다. 30대에서 40대 중반까지의 공장기사, 의료관계자, 대학교수, 컴퓨터기사, 연구소사무원, 사회주의권의 상사원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모두 12명)이 이른바 시국토론을 하는 모임에 이씨를 부른 것은 국제정세를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소련의 몰락까지 공산권 붕괴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고 김정일의 실정이 북한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음도 잘 간파하고 있었다. 7-80년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미행자를 따돌리며 삼삼오오 모여 학습토론을 했던 장면과도 유사한데 이들 북한의 비밀집회에는 한층 두꺼운 비애가 둘러쳐져 있다. 이씨가 체험한 마지막 학습회 장면을 엿보기로 하자.

나의 체류예정기간이 다 돼 마지막 학습회를 갖게 되었다. 지난번 학습회에서 5일쯤 지난 날이었다. 이번에는 학습회라기보다 나를 위한 송별회였다. 지금껏 이 나라의 실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배울 수 있었다. 북한사람들이 문제의 소재와 문제해결 방법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뭔가 도발이 예상되었지만 나의 본심을 드러내 보기로 했다.

“당신네들의 생각은 그런대로 알겠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얘기해 봤자 소용없는 것 아닌가.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공부모임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돌연 엄숙한 분위기로 변했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지배했다.‘말이 지나쳤나' 생각하고 한 사람 한 사람 표정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험악한 표정을 하고 있다. 리더격의 컴퓨터 기사가 조용히, 그러나 분노를 섞어 말했다.

“우리를 비겁자라고 말하고 싶은가" 나는 침을 삼켰다. “우리는 재일북한인 당신네보다 용감한 지도 모른다.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나 하나만 희생한다면 내일이라도 데모든 뭐든 한다. 하지만 이 나라의 탄압은 장난이 아니다. 가족이나 친족까지 강제수용소로 보내 버린다. 나이든 양친, 처자까지 짐승같은 생활을 시킬 각오가 필요하다. 입장을 바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국에서는 반체제 시위가 있는데 북한에서는 어째서 없는지 아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남쪽은 데모가 ‘가능하지만' 북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안의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지자 사내는 슬쩍 웃으며 말을 맺었다.

“때가 오면 우리도 일어선다. 당신도 일본에 돌아가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길 바란다. 성원(聲援)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최고의 무기가 된다. 그 다음은 북한 민중이 한다”

북한유학체험을 통해 이영화씨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북한의 장래를 고려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북한민중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북한에 대한 관심은 어디서든 비등하지만 ‘북한의 시민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점이 없고, ‘북한의 국민은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비판능력이 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라고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다는 데 강한 일침을 놓고 있다.

이씨가 북한을 떠나면서 비밀집회원들로부터 받은 작별선물은 몇 사람의 소장분을 모은 자본론 한 질이었다. 마르크스도 내침을 당하는 북한사회를 체험한 정통파 맑스주의자 출신 이영화 교수, 그의 북한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은 이들의 뜻을 잊지 않겠다는 의리에서 일단 출발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러나 1991년의 일이면 그 역시 아득하다. 그 사이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지난 몇 년간 조용하고 대대적인 학살의 시간을 이 12인은 잘 넘겼는지 눈감아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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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1996년 문예춘추사에서 문고판으로 출판되기 전 1994년 한국에서도 [평양 비밀집회의 밤](동아출판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바 있다(절판). 단 제7장‘일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제명처분’의 부분은 새로 씌여져 덧붙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