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 in SK Interview: 주체탑 설계에 함께 했던 북한 여성건축가 장인숙씨
‘북한’이라는 말만 들어도 확 끼쳐오는 통상의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은 북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거부감이 한꺼번에 사라지리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어디에서 나고 자랐건 상관없이 그저 ‘사람’인 어떤 평범한 존재와의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기도 할 것이고 나쁜 사람이기도 할 터이지만 굳이 북한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어디서 태어났고 살았던 것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 기준이 못된다는 것을 남한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다. 특히 북한이라는 험악한 이미지가 고스라니 선입견으로 돼 버린 증오의 역사를 벗기 위해서 ‘만남’은 시작되어야 한다.

Keys가 이들을 만나러 간다. 남한속의 북한(NK in SK)이라고 했지만 사람이 선 자리, 앉은 자리에는 어디든 동서남북이 있듯 남과 북도 단순 방위일뿐 삼엄한 경계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차별짓고 가르는 온갖의 경계선: 인종, 이념, 민족, 출생지, 빈부, 남녀......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존중한다. keys는 귀순자도 탈북자도 망명자도 아닌 북에서 온 ‘사람’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

한가한 북한건축가

Keys가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1997년 남으로 온 장인숙씨다. 그는 서울 강남의 한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막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유형지 온성에서도 독일유학까지 갔다온 차남은 탄광지배원으로, 만경대혁명학원에서 비행기 조종사 교육을 받던 3남은 닭똥 치우는 일을 해야 했으며 수재학교인 평양제1고등중학교에 다니던 막내는 철도의 석탄찌꺼기와 인분 등을 치는 일을 하는 동안에도 장씨는 지난 경력을 살려 설계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온 지 2년이 넘었지만 간간히 들어오는 강의 요청을 빼고는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 건축가로서의 경력을 살려 북한의 건축토목현황과 북한재건에 대해 자문을 하거나 연구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서 그의 실망은 컸다. 북한에서 수준급의 건축가로 대우 받았던 경력은 이곳에서는 거의 무의미해져 버린 상태다.

대부분의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생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이 뚜렷했다. 특히 남편을 일찍 여의고 네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온 어머니로서의 모정이 남달랐다. 대부분의 탈북자와 마찬가지로 빼어난 언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Keys는 이 북한 출신 인텔리 여성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한 한국 생활의 고뇌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앞으로도 쇄도해 올 탈북자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기 전에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이 Keys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건설에 한 일이 없지만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할 동안에 내가 무엇을 했던가 생각해 보면 불만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내 아들들은 북한에서 유학생으로 뽑혔다면 수재중의 수재입니다. 구소련 유학 중에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던 큰아들 현이나 나의 셋째 넷째 아들이 단지 북한출신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할 일을 못 찾게 되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장씨는 남한 사람들이 북한출신의 사람들을 하나 같이 ‘굶어죽을 것 같아서 온 거지같은 사람들’로 치부하고 낮추어보는 것에 항변했다. 무엇보다 북한 출신 전문인들이 통일에 대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것에 낙담하고 있었다.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의 인텔리나 전문가들을 겉돌게 한다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당장 여기 와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대학교원을 하던 사람이 접시를 닦게 버려둔다면 인력 낭비일 뿐 아니라 잠재적 불만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갖고 올 것입니다. 북한의 의사들은 생명이 아니라 무생물을 다루었단 말입니까? 언젠가 의사 출신 북한사람이 민방위 훈련소에 초대되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한민국 의사나 교수는 강의료가 너무 비싸서 북한의사를 불렀다고 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북한에서 알아주는 공과대학 출신이었는데 기껏 인정해 주어서 모 기관 보일러 임시 견습공으로 쓴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북한의 고급인력을 살려내야

스스로 건축가로서의 자부심을 잊지 않고 있는 장씨는 건축에 관해서는 할 말이 더욱 많았다. “어떤 사람이 컴퓨터도 없이 어떻게 건물을 지었냐고 묻더군요. 사인 코사인 계산해 가면서 수판 두들겨서 지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구조설계는 정확하게 합니다. 시공, 감리도 제대로 합니다. 백화점과 다리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건 상상도 못합니다. 물론 남한에 와서 적은 인력으로 엄청난 건설을 해내는 걸 보고 놀랍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 거의 인해전술로 해내는 것과는 다르더군요. 처음에는 영종도 신공항 건설현장 같은 데도 사람이 별로 안 보여서 짓다가 멈췄는 줄 알았죠. 알고 보니 최신 기계가 사람이 할 일을 대신 하고 있었던 것이더군요. 건설자재도 질이 아주 좋고요.”남한의 뛰어난 건축설비와 자재, 설계능력에 대해서도 장씨는 거침없이 칭찬했다. 그는 건축의 기술면에서 북한의 건축가가 뭔가 조언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통일 준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겁니다. 대단히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해온 북한의 건축가들을 그대로 밀어내고 북한 건설을 도모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들도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사람 스스로 북한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여기서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요. 특히 사심없이 자신의 혼신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순수 북한 기술만으로도 170m탑을 세울 수 있는 기술자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김정일 독재가 얼마가 나쁜지 그 체제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이제 김정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히 북한의 재건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잠재인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통일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선 특히 필요한 일입니다.”

북한사람들의 헌신성을 북한재건에 바치도록

사선을 넘어 한국으로 온 북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0에서 시작하라.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라고 장씨는 말한다.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장씨는 섭섭한 점이 많다.

“북한 출신은 모두 2등 국민이 되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통일된 사회에서 잠재적 불만세력이 형성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됩니다. 그건 낭비일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남은 인생을 조국 통일을 위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정신력이 강합니다. 저는 여기 와서도 밥알 하나 함부로 버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저렇게 굶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낭비를 하겠습니까?”이 대목에서 장씨는 그만 목이 메였다. ‘통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그의 말은 이미 우리들의 일상어의 세계에서는 낯선 것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체제의 특징으로 인하여 自가 아닌 他를 위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을 수 있도록 훈련받아온 이들이다. 그들의 이타심은 결국 수령 개인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왜곡되어 버렸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심’에 있어 북한사람들은 특별하다.

장씨에 따르면 북한에는 군대에서 하반신 불구된 남자에게 자진해서 시집가는 여성도 많다고 한다. 너무나 순수하고 건전하며, 대부분 사회활동을 하고 있지만 가정에서는 주부와 어머니 역할에 충실한 그녀들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자기의 희생을 마다 않는다고 말한다. 북한은 가족끼리도 서로를 고발하는 무시무시한 사회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극소수일 뿐 못 사는 사람일수록 정이 많고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은 순박한 마음으로 욕심 없이 살고 있는데 잘못된 제도가 이들을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이게 한다고 한다. 김정일정권과 북한의 일반민중들을 확연하게 구분해 놓고 보면 북한민중들이 갖고 있는 도덕과 선(善)의 수준은 어쩌면 남한에 대해 비교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드문 품목일지도 모른다.

Keys는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장씨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들 북한 사람들을 타락시키지 않고, 2등국민화시키지 않고 그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은 무엇일까" 체제 실패로 인한 극한 상황속에서도 인간됨을 유지하기 위해 처절하게 고투하고 있는 저들 북한민중들에 대해서 우리가 실례하지 말하야 할 것이 있다. 그들에게도 비판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자생할 수 있는 생명력이 있다는 것. 자신의 차남이 남아 있을 북한땅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무력감을 솔직히 말해준 장인숙 여사께 Keys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북한에 기술과 인재가 없다면 아름다운 능라도 경기장과 150m 깊이의 지하철, 170m 높이의 주체탑은 누가 건설했겠는가? 무너졌다는 소리 한 번 들은 적 없는 높은 건물과 튼튼한 다리는 누가 지었겠는가? 북한의 기술에도 비법은 있다. 한국내 북한 건축토목 연구기관에서조차 탈북 전문기술자를 고용하거나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남으로 온 사람들이다. 내게도 통일을 위해 할 일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를 바란다.

장인숙씨는 함북 청진 태생으로 평양 운수대학 교량터널과를 졸업하고 설계원 (우리나라 건교부 차관과 국장 사이의 직급에 해당)으로 26년간 근무하며 북한의 주요 건설사업에 참여한 바 있다. 170m 높이의 김일성주체사상탑과 폭 100m 길이 8km짜리 광복거리, 평양-남포간 고속도로 등을 건설했다. 그가 다룬 프로젝트는 교량, 지하도, 고가도로 등 다리 관련 공사만 100개가 넘는다. 북한 당국으로부터 9개의 훈장과 김일성 김정일의 표창을 받고 4차례의 기념활영을 하는 등 북한의 대표적인 여성 건축가로 활동했다.군 고위장성 출신이었던 남편과 수재로 통했던 네 아들, 그리고 평양시 설계사업소 설계원이자 노동당 세포비서였던 장인숙씨 본인의 이력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 그는 북한에서 상류급의 삶을 누렸다. 남편이 1978년 신장암으로 사망한 후 네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나 장남 정현씨가 김책공대 졸업후 국비유학생으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공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다 지난 90년 8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그후 장씨 가족은 탄광촌인 함북 온성으로 여겨가야 했다.온성에서 지내던 중 장남 정현씨의 도움으로 북한을 탈출 한국에 들어왔다. 친정 부모와 형제가 핍박 당할 것이 두려웠고 그가 젊은 시절부터 신봉했던 북한 체제와 제도를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아 탈북이 쉽지 않았지만 차남이 자신의 장인 장모와 탈북을 상의하는 과정에서 사실이 알려져 보위부에 체포된 날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져 탈출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차남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 소식을 알 수 없는 차남은 장씨 일가의 상처로 남게 되었다.